최근 안방극장에 ‘타임슬립’(Time-Slip, 시간여행)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가 속속 등장해 눈길을 끌고 있다.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판타지를 배척하던 드라마 시장에 새로운 물결이 밀려오고 있는 셈이다. 2003년 ‘천년지애’ 이후 10년 가까이 감감무소식이던 시간여행 소재 드라마가 갑자기 많아지게 된 이유는 뭘까? 또 안방극장에 소개됐으며, 방송을 준비 중인 타임슬립 소재 드라마는 어떤 작품들이 있는지 알아봤다.
◇박유천 주연, 타임슬립 대표작
SBS ‘옥탑방 왕세자’
사랑하는 세자빈을 잃어버린 조선 왕세자 이각이 3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21세기의 서울에서 새로운 연인을 만나게 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
최근 안방극장에 타임슬립 드라마의 붐을 일으킨 대표적인 작품. 조선시대 왕세자와 네 명의 신하들이 2012년 서울에서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코믹하게 그려 눈길을 끌었다. 사극에 등장하는 문어체 대사와 딱딱한 표정연기를 현대극에 도입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펼쳐진 절절한 로맨스에 미스터리를 추가해 두 배의 재미를 줬다.
◇타임슬립 첫 도입...성유리 첫 히트작
SBS ‘천년지애’
남부여의 공주가 시간을 거슬러 현대에 떨어지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룬 드라마. 과거에 얽혀있던 인연의 끈을 2000년대를 배경으로 풀어내면서 호기심을 자아냈다.
국내 최초로 타임슬립을 소재로 도입한 드라마. 걸그룹 핑클 출신으로 연기자 전환을 선언한 성유리의 첫 번째 히트작이다. 고대 남부여의 공주가 현대로 날아와 과거 자신과 얽혀 있던 남자들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재치 있게 풀어냈다. 공주 성유리가 현대문명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을 코믹하게 풀어내는가 하면 절절한 멜로와 액션까지 가미해 큰 인기를 끌었다. 앞서 1996년 흥행에 성공한 영화 ‘은행나무침대’와 유사한 설정. 안방극장에서 드문 소재라 방송 전 우려의 시선을 받았지만 높은 시청률과 화제성으로 흥행에 성공을 거뒀다.
◇송승헌 명의 열연, 조선시대 오가는 의학물
MBC ‘닥터진’
2012년의 대한민국 최고 의사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그린 의학드라마
현대의 인물이 과거로 날아가 역사를 바꾼다는 전형적인 타임슬립 소재 드라마에 의학이라는 첨가제를 투입했다. 2000년대 첨단의학을 배운 의사가 조선시대로 날아가 재능을 발휘한다는 흥미로운 내용으로 방송 전부터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방송 초반부터 조선시대에 떨어진 의사 송승헌이 수술도구도 없이 망치와 정을 들고 환자의 뇌수술을 감행하는 등 눈길을 끄는 장면들을 내보내 몰입도를 높였다.
◇고려 무사와 여의사의 사랑 이야기
SBS ‘신의’
고려시대의 무사와 현대의 여의사가 시공을 초월한 사랑을 나누는 과정을 그리는 드라마
2000년대에 살던 의사가 고려시대에 떨어진다는 설정이 ‘닥터 진’과 유사해 두 드라마 제작진 사이에 감정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수차례 내용을 수정하고 캐스팅을 바꾸는 등 난항을 거친 끝에 현재의 모양새를 갖추게 됐다. 현대에 살던 여의사가 고려시대 무사에게 납치돼 과거로 날아간 후 현지에서 만난 스무 살짜리 공민왕을 고려의 왕으로 즉위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내용을 그릴 예정이다.
◇300년 시간여행...시청률 2%대 기록
tvN ‘인현왕후의 남자’
내용 : 인현왕후의 복위를 위해 300년을 거슬러 시간 여행을 하게 된 조선시대 선비와 2012년 인현왕후 역을 맡은 무명 여배우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
케이블 채널에서 방송했는데도 2%대를 뛰어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성공을 거뒀다. 무엇보다 내용에 대한 호평이 이어졌으며 높은 화제성으로 이슈가 됐다. 조선시대 남자와 2012년에 살던 여자가 만나 로맨스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애틋하게 그려내 탄탄한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부적을 사용해 자유자재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는 설정을 통해 다른 타임슬립 소재 드라마와 차별화를 선언했다. 빠른 전개와 감각적인 영상미로 ‘웰 메이드 드라마’란 말을 들었다.
○…‘타임슬립’은?
인류의 시간여행 꿈 대리만족
시간을 거스른다는 뜻의 타임슬립이란 용어는 1994년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류가 소설 ‘5분 후의 세계’에서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앞서 SF문학사를 대표하는 작가 필립.K 딕이 1964년에 ‘화성의 타임슬립’이라는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2008년에는 일본 작가 오기와라 히로시가 ‘타임슬립’이란 제목의 소설을 냈다.
2009년 일본의 만화 ‘타임슬립 닥터진’까지 히트를 치면서 타임슬립이란 단어는 시간여행을 일컫는 대표적인 용어가 됐다. 국내에 타임슬립이란 말이 심심찮게 등장하게 된 것도 ‘타임슬립 닥터진’이 국내 제작진에 의해 드라마화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난 뒤부터다. 이처럼 시간여행이라는 흥미로운 소재에 의학드라마의 장르적 특성을 적용하고 여기에 트렌디한 멜로까지 가미해 다양한 작품들이 기획되면서 젊은 층의 열렬한 지지를 이끌어 냈고 타임슬립이란 단어 역시 특별한 설명 없이도 편하게쓸 수 있는 조어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타임슬립 소재 드라마가 갑자기 많아진 이유는 뭘까?
드라마 관계자들은 ‘새로운 것을 찾는 시청자들의 취향에 맞게 진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옥탑방 왕세자’에 이어 ‘신의’를 제작 중인 SBS의 김영섭 드라마 국장은 “과거에는 조금만 비현실적인 내용이 나오면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기 일쑤였다. 타임 슬립 소재의 ‘천년지애’가 성공을 거뒀지만 당시 지상파 최초로 주말에 편성되면서 경쟁작 없이 방송돼 더 주목받은 면도 있다. 그 뒤로 유사소재 작품이 나오지 않았던 것도 흥행성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과거와 달리 요즘 젊은 세대들은 게임이나 판타지 소설 및 영화를 통해 ‘가상의 현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타임슬립이란 소재를 써도 ‘말이 된다’라고 생각하고 몰입할 수 있게 됐다는 말”이라면서 “시청자들의 포용력이 넓어졌다는 것은 제작진 입장에서도 반가운 일이다. 그만큼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앞서 ‘시크릿 가든’ 등 판타지 드라마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방송사에서도 장르와 소재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특히 타임슬립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다양한 볼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고 캐릭터 역시 변화무쌍해 두 배의 재미를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닥터진’의 또 다른 관계자도 “인간이 날고 싶다는 욕망으로 비행기를 만들어 낸 것과 달리 시간여행은 쉽게 이뤄지지 못할 꿈이다. 이론적으로도 많은 결함이 있는 시간여행의 꿈을 드라마와 영화가 대리만족시켜주고 있다”라면서 “이제 완성도 높은 영화를 통해 길들여진 시청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밀도가 높은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