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태권V' 말고도 많다. 영혼기병 라젠카!'라는 어느 로봇 마니아의 글귀가 회자되고 있는 것은 자못 의미가 크다.
내가 1996년부터 기획·제작에 참여하고 투자했던 애니메이션 '영혼기병 라젠카'(이하 '라젠카')는 1997년11월3일 MBC에서 첫 방송을 탔다. '마징가Z' '기동전사 건담' 등 일본 슈퍼 로봇 애니메이션에 대적할 만한 국산 로봇을 키우자는 야심에서 출발한 프로젝트였다.
'라젠카'는 손오공과 애니메이션 전문채널인 투니버스가 50%씩 투자해 만든 애니메이션이었다. 외부에서 알려진 바와 달리, MBC는 제작·투자와는 전혀 상관없고, '라젠카'를 방영한 채널일 뿐이다. 손오공 투자분은 모두 내 사비를 들였다. 당시 막 오픈한 투니버스와 함께 한 첫 합작이기도 했다.
'라젠카'는 22세기 새 문명을 개척하는 인간들의 수호자다. 애니메이션 제작진은 '라젠카'의 타깃을 14세 이상과 성인층으로 잡아왔다. 당시 일본에서 성인 타깃의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일본 청소년 마니아층을 형성할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어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한국에선 타깃이 더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라젠카'의 주타깃은 12세 이하 초등학생으로 삼았으면 했다. 방송시간이 청소년층 시청대와 맞지 않았고,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청소년층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라젠카'의 디자인은 고구려 복식을 바탕으로 했다. '라젠카'의 바디라인이나 문양을 세련되면서도 독특한 한국적인 이미지로 만들고자 했다.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명감도 반영된 것이다.
'라젠카' OST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인기가 하늘을 치솟고 있던 가수 신해철이 부른 OST는 순식간에 30만장이나 팔려나갔다. 그러나 타깃이 높게 설정된데다, 폭력성 등에 대한 당국의 심의가 까다로웠던 탓에 색깔을 잃은 애니메이션과 로봇 완구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모든 사업이 잘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애니메이션은 돈을 벌기보다는 투자를 해서 키워가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일종의 봉사정신이 필요한 사업이다. '라젠카'의 경우 애초부터 타깃을 낮춰 접근하지 못한 부분은 너무도 아쉬웠다. 어중간한 타깃으로 제작된 '라젠카' 투자로 난10억원을 까먹었다. 일본도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후 굵직한 메카닉물을 배출하지 못했다.
당시 일본에서도 '라젠카'를 상당히 주시했다. 지금도 만다라케 같은 일본의 중고상품 매장에선 '라젠카'가 거래되고 있다. 지난해 국내에선 삼성의 '끝판대장' 오승환이 테마곡으로 '라젠카, 세이브 어스(Lazenca, Save us)'를 택해 화제가 됐다. 장중하면서도 위압감을 주는 이 곡은 '라젠카'의 인기 OST였다. 삼성 측이 팬들에게 오승환의 테마곡으로 추천을 받았다고 한다. 오승환이 9회에 등판할 때 이 곡이 마운드에 울려퍼진다. 일본 로봇의 극복과 흥행, 두 마리 토끼를 잡진 못했지만 오랜 세월 팬들에게 사랑받는 콘텐트를 남긴 것은 보람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