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년 만에 대가뭄이 찾아왔다. 얼마 전 산정호수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호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호수바닥은 거북이등처럼 갈라져있었다. 산정호수 뿐 아니다. 전국의 논밭에 물이 없어 난리다. 농사를 포기해야할 정도로 농심(農心)은 타들어가고 있다.
이럴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기우제뿐이다. 전 세계 기우제중 가장 확실한 기우제는 미국 애리조나 호피 인디언 기우제라고 한다. 호피 인디언 기우제의 성공률은 100%. 이유는 간단하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다. 왕이 친히 종묘사직·4대문·한강 등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농사가 주산업이던 당시 가뭄은 천재지변 중 하나였다. 가뭄이 발생하면 백성은 굶어죽고 유행병까지 돌며 화전민은 늘어나고 나라의 재정도 파탄된다. 왕이 올리는 기우제에는 단지 하늘을 향한 제사의식만이 아닌 백성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뜻도 담겨 있었다.
1960년대, 나는 기도처를 떠돌아다니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해는 사상 초유의 가뭄으로 인심이 유독 흉흉했다. 하루는 시골 마을에 기도를 하러 갔는데 산중턱에 오를 때 즈음 마을 사람들끼리 삽자루를 들고 대판 싸우고 있었다.
“명당에 묘를 써서 비가 안 오는 게 아니오! 이 묘를 당장 파지 않으면 우리가 직접 파겠소!” 삽자루를 든 여러 명의 마을 사람이 한 가족을 가운데 두고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자 가족의 가장인 듯 보이는 남자가 팔을 걷어 부치고는 “왜 남의 묘를 함부로 파려고 하시오! 비가 안 오는 게 명당에 묘 쓰는 것과 무슨 상관이오?”라고 따졌다.
가만히 듣자니 지독한 가뭄이 온 이유가 한 가족이 마을 명당에 묘를 썼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 명당은 함부로 묘를 쓰면 안 되는 자리인데 명당 욕심에 묘를 썼으니 마을에 가뭄이란 재난이 찾아왔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과학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허름한 옷차림으로 기도를 하러 가던 나는 언쟁을 말려야겠다는 생각에 싸움이 벌어지는 한복판으로 끼어들어갔다. 그리고는 마치 도사처럼 “저는 전국방방 곳곳 기도하러 다니는 처사입니다. 제가 풍수를 좀 아는데 이 자리는 결코 명당이 아닙니다. 하늘을 보니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다들 논물 댈 준비나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처음엔 어리둥절해하던 주민들이 당장 비가 온다는 말에 반신반의하며 서둘러 논물을 대기 위해 산 아래로 내려갔다. 덩그러니 남은 가족은 허탈한 표정으로 “이 터가 정말 명당이 아닙니까?”라고 울먹이며 물었다. 나는 “명당은 땅이 아니라 사람이 만듭니다. 마을 사람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벌이십시오. 그래야 명당을 지킵니다”라며 허허 웃었다.
얼마 후 산기도가 끝나는 날 거짓말처럼 큰 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며 산을 터벅터벅 내려오는 길에 그 명당자리를 지났는데 다행히 묘는 건재했다. 명당 터를 내놓으라며 삽을 들고 한바탕 언쟁을 벌였던 마을 주민들도 비가 오자 논에 물을 대느라 분주히 몸을 놀리고 있었다.
하늘의 가뭄도 해결해야하지만 가장 급한 것은 우리 마음의 가뭄이다. 가뭄이 지면 마음의 물도 말라 인심이 야박해지고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7월3일 여섯 번째 백일기도가 끝난다. 곧 큰 비가 시작될 것이다. 대학로 후암선원에서 열심히 기우제를 올리고 있으니 조금만 참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