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 김현수(왼쪽)가 4일 광주구장에서 경기 전 훈련을 마친 나지완(오른쪽)에게 다가가 모자를 벗고 사과의 뜻을 전하려 했지만 나지완이 외면하고 있다.
#2006년 6월5일 인천
SK 투수 신승현이 롯데 외국인 타자 호세와 빈볼 시비 끝에 난투극을 벌였다. 호세가 옆구리에 공을 맞고 마운드로 달려갔고 신승현은 더그아웃으로 가 배트를 꺼내 들었다. 극단적인 폭행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논쟁의 여지를 남겼다. "국내 투수들과 싸운 게 벌써 몇 번인가. 호세가 너무한다." "호세는 마흔 살 넘은 선수다. 국내 베테랑 타자였다면 젊은 투수가 방망이를 들 수 있겠는가."
#2012년 7월3일 광주
KIA 나지완이 두산 프록터의 위협구에 분노하며 언쟁을 벌였다. 양팀 선수들이 몰려나와 대치했다. 나지완은 신일중·고 2년 후배인 두산 김현수가 흥분하는 것에 더욱 분노했다. 둘은 따로 언쟁을 벌였고 이튿날에도 끝내 화해하지 않아 논란을 만들었다. "직속 후배인 김현수가 선배한테 욕을 한 건 지나치지 않는가." "나지완이 유독 김현수에게만 화내는 이유를 모르겠다."
두 장면은 묘하게 대비된다. 치열한 승부에서는 오직 피아(彼我)만 있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빈볼시비에도 한국 사회 특유의 선후배 문화가 녹아 있다. 투수와 타자의 싸움, 피해자와 가해자의 갈등이 결국 선후배의 위계 문제로 귀결된다. 이번 사태처럼 본말이 뒤바뀌기도 한다.
나지완은 프록터와의 오해는 금방 풀었다. 프록터가 인종차별적인 말을 했다고 오해했고, 빈볼까지 날아들었지만 툭 털어버렸다. 대신 '후배' 김현수는 용서하지 못했다. 외국인 선수의 빈볼보다 후배의 욕설이 앙금으로 남은 것이다.
잘잘못, 그리고 선후배
한국 프로야구의 '선후배 문화'는 상당히 독특하다. 나지완은 "김현수는 내가 3학년 때 1학년이었던 후배다. 같이 야구를 한 사이인데 그러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승부가 치열할 때는 선후배 없이 싸우다가도 금세 감정이 가라앉고는 하는데 하루가 지나서도 화해를 하지 못한 건 아주 드물다.
지난달 6일 대전에서 한화 김태균(30)이 롯데 김성배(31)의 공에 허리를 맞았다. 평소 허리 통증이 있는 김태균은 1루로 걸어가며 김성배를 노려봤다. 이 과정에서 둘은 말다툼을 벌였다. 김태균은 "(맞힌 것을) 사과하라"고 했고, 김성배는 "고의가 아니다"라고 맞섰다.
사태 본질이 갑자기 바뀌었다. 김태균은 1군 무대에서 상대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김성배를 후배로 착각했다. 그래서 사과하지 않는 김성배에게 화를 냈다. 반면 김성배는 빈볼이 아니라고 주장하먼서 선배에게 대드는 김태균에게 감정이 상했다.
김성배가 선배인 것을 알아차린 김태균은 다음날 김성배에게 가서 "선배인 줄 몰랐다. 선배인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사과했다. 사과를 요구했던 선수가 되레 사과를 하는 상황이었다. 김태균은 취재진에게 "선배라도 빈볼은 안 된다"고 말했지만 어쨌든 고개를 숙인 쪽은 김태균이었다.
김태균은 5월31일 삼성 배영수(31)에게 사구를 맞고 1루로 걸어갔다. 마운드에 있던 '선배' 배영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되레 배영수가 "태균아, 미안해"라며 두 번이나 사과했다. '선배'한테 맞았다면 웬만하면 참는 게 보통이다.
외국인 선수 "이해 못해"
외국인 선수들은 한국 야구의 위계질서를 이해하지 못한다. 사구를 던진 뒤 사과하는 것도 당연히 납득하지 못한다. 한 외국인 투수는 "난 그럴 필요가 없다. 한국에서 학교를 나왔다면 사구를 맞힌 뒤 미안함을 표시할 수도 있겠지만…"이라며 한국의 독특한 문화를 지적했다. 또다른 외국인 투수는 “투수가 모자를 벗고 인사 한다는 것을 한국에 온 뒤 처음 알았다. 개인적으로 인사를 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한국 야구의 문화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일본에선 모자를 가볍게 벗거나 손짓으로 미안함을 표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미국에선 '투수가 사과하면 타자에게 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일본 문화와 가깝고 한 다리 건너면 모두 선후배로 얽히는 특수성까지 있다.
2000년대 초 득세했던 외국인 타자들은 툭 하면 국내 투수들에게 달려들었다. 호세·우즈(전 두산) 등이 대표적이었다. 최근엔 외국인 투수들이 많아졌고 국내 타자들도 지지 않는다. 올 시즌 삼성 이승엽이 LG 리즈와, SK 정근우가 넥센 나이트와 다퉜다. 성격 순한 이들이지만 외국인과는 선후배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위협구가 날아오면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다. 한국 특유의 선후배 위계가 다툼을 억제하기도,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