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혹은 1997년? 암튼 그때 즈음. 개그맨이 된지 6년차 정도였는데 나는 아직도 희극인실 의자에 편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선배들이 너무 어려워서였다. 겪어보고 비교하건대, 군대의 고참들이 대하기 더 쉬웠다. 군대 고참이야 어리기도 하고 좀 긴장한 척 하면 잘해주기도 하는 그런 관계가 만들어지니까.
암튼 개그맨들의 상하 질서는 엄격하기로 소문이 다 나있다. 뭐 아무리 요즘 편하고 어쩌고 해도 KBS 개그맨 간에 넘어가지 않는 어떤 선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엄격함이 있던 개그맨들은 어떤 분야의 연예인을 봐도 선후배를 잘 지키며 사는 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차태현’ 이라는 인물이 적당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나는 방송국 라디오 부스 같은 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내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형 요즘 바쁘지? 형도 힘들겠다”라고 말한다.
우와~!! 미국인처럼 그냥 존대고 뭐고 없이. 분명 나랑 5살은 어린데. 너무 당황해서 “응? 뭐 그렇지” 라고 해버렸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냥 너무 자연스러워 그것을 갖고 ‘너 왜 야자 까냐?’ 같은 말을 할수도 없었다. 그 후 나는 차태현과 밥 한번 먹은 적이 없지만 오다가다 보면 디게 친한 동생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난 차태현 전화번호도 모른다. 근데 그냥 걔랑 나랑은 무지 친한 사이 같은…. 뭐지? 내가 왜 차태현 영화 잘 되면 기쁘고 막 그러지?
세월이 흘러 내가 선배 쪽에 오게 되었다. 확실히 ‘선배급’이다. 이제 느껴지는 것이 있다. 요즘 시대에 선배 엿 먹이는 최고의 방법이 ‘어려워’ 하는 것이다. 담배 피우다 급히 끄고. 술자리 내내 술잔을 옆으로 돌려 가리고 마시고, 뭐 먹다가도 선배가 이야기 하면 숟가락 놓고 경청하는 것이다. 오히려 차태현 같은 녀석이 고맙고, 귀엽고, 적금 타면 내 꼭 저 놈 만큼은 뉴스에 나왔던 그 룸살롱을 데려가리라 하는 다짐도 생기게 된다. 이제 엄하고 무서운 선배는 인기 제로다. 연예인이고, 직장인이고 언제 짤릴지 모르는 시대에 공감 가는 사람 꽤 많으시리라.
이제는 각 분야에서 다들 느끼는 것이다. 고압적 자세의 선배는 끝내 왕따 당하다 망한다는 것을. 물론 그 수직적 관계가 상명하복으로 '까라면 까'는 정신으로 우리나라를 발전케 한 것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나 바뀌는 시대를 적응해야지. 그 많은 이들이 외치던 수평적 관계로의 전환은 이제 대세다.
이미 기업에서는 시작 된 곳이 많다. 제일기획에서는 사장과 사원 전직원이 ‘프로’ 라는 직함으로 불리운다. 한화 케미칼, 대한생명도 부장이하 차장·과장·대리로 불리는 서열화 직급 명칭을 매니저로 통일했다. SK는 이미 2006년 팀장 이하 매니저. KT는 지난 2월. 부장~대리를 매니저로 통일했다. 이런 변화에 대한 기대는 경직되지 않은 분위기에서 창의적인 생각이 나오고 그것이 효과적인 능률상승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오래 전 일간스포츠 기자들과 술자리가 있었는데 젊은 기자가 국장님께 “국장 한 잔 더 하시죠?” 하는 것에 깜놀 했던 기억이 있다. 이 친구가 취했나? 알고보니 국장이라는 존칭에 다 들어 있는데 왜 ‘님’까지 쓰냐는 것이다. 아마 기자로서 위에서 누르는 것에 쫄지 마라는 어떤 12대조 대선배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이제 나도 마흔이 넘으니 차태현의 왕싸가지 반말이 그리워진다. (앗? 나만 나이 먹은거 같지만 유재석도 41살인데 뭐.ㅎ)
자~ 오늘 도전해 보시라!! 차태현처럼! 사원이여~ 대리여!! 당장 사무실 부장에게 가서 외치시라! “김 부장 오늘 냉면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