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낯선 바닷가 도시에서 색다른 경험을 했다. 한반도 남쪽 땅 끝에 있는 도시 가운데 하나에서 강연 요청을 받았다. 내가 사는 곳에서 400㎞ 가까운 먼 길이어서 강연날짜가 다가오자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오전 열 시에 강연이 있어 어차피 당일 아침에 출발했다가는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KTX가 직접 닿지 않는 곳이었던 데다 버스터미널에서 강연장이 있는 리조트까지 거리가 있어 시간이 제법 걸릴 듯 했던 것이다.
이른 아침 시각에 비행기를 예약했다. 그 전에 쓰지 않고 쌓아둔 마일리지를 써서 예약을 하고 보니 머리가 제법 돌아간 것 같기도 해서 딴에는 흐뭇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공항에서 목적지인 리조트까지 운행하던 리무진 버스 노선이 손님이 없어서 폐지되었다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너나 할 것 없는 불황기에 리무진 버스를 운영하고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불황 걱정 하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공항이 있는 도시의 시외버스터미널로, 거기서 강연이 있는 도시의 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한 뒤 또 택시를 타든 버스를 타든 해서 리조트까지 가야 했다. 돈도 돈이려니와 그 시간이면 차라리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해당 도시 버스 터미널까지 가는 게 합리적일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비행기 예약을 취소해 버렸다.
차라리 하루 전날 오후에 미리 가서 유명하고 아름답고 맛있다는 도시의 진미, 진경을 맛보고 다음날 아침 강연을 하고 나서 유람삼아 올라오는 건 어떨까. 생각만으로도 근사했다. 오랜만에 승용차를 직접 몰고 남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문제는 다섯 시간은 좋이 될 오랜 시간이었다. 물론 맘에 맞는 동행이 있으면 된다. 그것도 한 번도 함께 여행을 가보지 않은 친구라면 더더욱 좋다. 작심을 하고 사방에 낚시를 드리웠다. 미끼는 “남쪽 항구도시 1박2일 여행 동행 구함. 숙박 최고급 리조트 무료 제공. 교통편 무료. 환상적인 운전 기사의 안전운행. 제철 자연산 회 무한제공”이었다. 마침내 하나가 걸려들었다. 특히 ‘제철 자연산 회’라는 미끼에 바닷가 도시 출신인 C가 입질을 해왔다. 제꺼덕 낚아챘다.
“정말이야. 자리돔이 제철이라네. 멸치회가 끝물이라 지금 아니면 맛을 못 본대지 아마. 며칠 전에 방송으로 봤는데 참돔이 얼마나 올라오는지 그물이 찢어질 것 같더라고. 다음날 아침에 먹을 해장국은 또 어떻고. 복매운탕이나 멍게비빔밥, 아주 사람 미치게 만들어 주지.”
말은 하지만 나 자신은 하나도 제대로 먹어본 게 없었다. 그 지방 근처에서 먹어본 건 해산물과는 별 상관도 없는 헛제사밥이었다. 출발 당일 단 둘이 차를 타고 좁은 공간 안에서 동행하는 내내 평소 할 수 없던 속 깊은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방 배가 고파왔다. 숙소로 예정된 한반도 최남단 바닷가 리조트는 자연산 회와 지역 음식으로 유명한 시장 골목에서 좀 떨어진 곳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불문곡직하고 시장부터 쳐들어 가기로 의기투합했다.
“왔노라! 먹었노라! 맛있었노라!”
깃발을 휘날리며 다닌 적이 언제였던가. 이제는 소셜 네트워크까지 발달한 세상이니 따라오지 않은 의리 없는 인간들에게 무자비한 생중계 보복을 하기로 합의했다. 남쪽으로 갈수록 흐려지더니 비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행의 정취를 더하는 듯해 반갑고 고마웠다.
출발 다섯 시간 만에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네비게이터의 도움을 받아 어렵사리 시장 앞 도로 옆 관광버스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다른 사람이 차를 세우고 있기에 주차를 해도 괜찮으냐고 했더니 낮에는 관광버스가 차를 세우는 곳이지만 밤에는 관광버스가 가고 없으니 상관없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 자신도 외지 사람이라 잘 모르겠다고 하는 게 꺼림칙하긴 했으나 일단은 차를 세웠다. 이어 비릿한 바다 냄새가 풍기는 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C가 넋을 잃을 정도로 제철 자연산 물고기를 비롯한 해산물이 풍성했다. 때마침 풍어라서 값이 싸다고 했다. 고르느라 애를 먹을 정도였다. 참돔·감성돔·자리돔에 전복과 멸치·멍게·해삼·성게알 사이를 헤매다가 다른 손님들이 먹는 것까지 곁눈질로 참조해서 겨우 먹을 것을 확정했다. 물고기를 횟감으로 손질하는 사이 차를 제대로 주차하기 위해 다시 시장 밖으로 나왔다.
어두워진 거리에 비는 내리는데 주차장 반대편 도로변에 불을 밝힌 가게가 즐비하게 있었다. 관광버스 주차장에서 차를 빼내 한 빵가게 앞에 차를 댔다. 요리모자를 쓴 여자가 “오래 있을 거냐”고 물었다. 두 시간쯤 있을 거라고 하자 예쁘게 웃으면서 “내 가게 앞에 대는 게 장사에 방해되긴 하지만 할 수 없네요. 대신 회 먹고 나오거든 꼭 우리 가게 빵을 사주세요”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러겠노라고 했다.
회와 전복, 해삼의 맛은 가히 환상적인 맛이었다. C는 특히 열광했다. 사진을 찍어 여기저기 문자로 보냈더니 침으로 홍수가 났다고 아우성들이었다. 하도 싸기에 욕심껏 시켰다가 너무 많이 남았다는 게 문제였다. 음식을 싸달라고 하고는 음식점에서 가르쳐주는 전화로 대리운전자를 불렀다. 숙소인 리조트까지 얼마인가 묻자 8000원이라고 했다. 거리가 얼마인지 모르니 비싼 건지 싼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십여 분 뒤 시장 앞에 대리운전 기사가 당도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모는 작은 승용차를 타고 왔고 그 승용차는 숙소까지 따라와서 대리운전 기사를 도로 태워갈 모양이었다. 빵가게는 그새 문이 닫혀 있었다.
무뚝뚝한 대리운전 기사가 운전한 내 차는 약 20여 분 뒤 숙소에 도착했다. 비가 왔고 그만한 시간이 걸렸는데도 8000원밖에 안 한다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이천 원의 서비스료를 임의로 더해 만 원을 줬다. 대리기사는 당연하다는 듯 돈을 받더니 인사도 없이 차를 따라온 승용차를 타고 가버렸다.
다음날 아침, 시장 골목의 향토색 짙은 음식점이 맛있을 거라는 생각에 운전을 해서 다시 전날의 그 장소로 갔다. 그런데 전날 올 때와는 달리 좀 돌기까지 했는데도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시장과 리조트는 만 하나를 사이에 두고 빤히 보이는 거리에 있었다.
“이게 웬일? 내 운전 솜씨가 하룻밤 사이에 일취월장했나?” “그럴 리가. 어제 그 대리운전 기사가 길을 좀 돌아서 왔나 보네. 2000원 더 받으려고.” “2000원은 내가 그냥 고맙다고 보태준 건데? 내가 그렇게 줄 줄 알고 미리 돌았다고?” “어두워서 우리가 모른다는 걸 알고 돌았다니까. 여기서 보니 다리 하나 건너면 가겠네. 빤히 보이는군.”
그때부터 말놀이가 시작되었다.
“정말 사람 돌겠군. 그거 조금 더 벌려고 그렇게 내 차 기름 써가며 돌다니. 그럼 우리가 그 사람 때매 돈 인간들이라는?” “먼저 그 쪽이 돌기로 작심했고 우리는 모르니까 따라서 돌아버린 거지.” “일부러 돈 인간한테 고맙다고 돈을 더 줘? 돌겠네.” “돌아서 돈 받았으니까 그 돈도 또 돌고 있겠지?”
아침밥을 먹고 나서도 말놀이는 계속 되었다.
“이런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은 맛은 처음이야. 완전히 심신이 대리운전 당하는 기분인데.” “그러게, 환상적인 뽈락매운탕이군. 우리만 알고 있기는 아까우니까 세상 만방에 이 소식을 돌리자.”
집에 도착한 지 이틀 만에 주정차위반 과태료 통지서가 날아왔다. 빵가게 앞에서 찍힌 사진에 내 차의 번호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빵가게 주인은 왜 그리 예쁘게 웃으며 말했던 것일까 생각해 보려니 머리에 대리운전 기사가 찾아온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