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배트맨 다크나이트 라이즈'가 국내에서 500만 이상의 관객을 성황리에 동원하고 있다. 가면을 쓴 영웅이나 슈퍼히어로가 악당을 물리치는 만화나 영화가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것은 현실에서 정의가 무너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1990년 김흥국이 주연을 맡은 어린이 SF영화 '반달가면'은 그런 종류로 꽤나 인기를 끈 작품이다.
'반달가면'은 하얀 투구와 빨간 망토를 두르고 밤에 홀연이 나타나 악당들을 혼내주었다. 처음에는 비디오용 영화로 출시됐는데 비디오 대여점이 성황을 이루던 시기여서 나름 불티나게 팔렸다. 이 시기에 '반달가면'이 나타난 것은 어찌보면 엉뚱하다. 1980년대 중반까지 어린이 SF영화로 '우뢰매'가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이후로 이런 류의 영화들이 거듭 맥을 추지 못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공백기도 생겼다.
'반달가면'은 한 해 전 촉발한 두 가지 요소의 영향을 받았다. 1980년 중·후반 콧수염에 하얀 양복을 입은 가수 김흥국이 '호랑나비'를 부르며 쓰러질 듯 춤을 춰 어른·아이들 사이에 최고의 흥행카드로 떠올랐다. 그리고 만화 '배트맨'이 팀 버튼 감독에 의해 처음으로 영화로 제작됐다. '반달가면' 제작진은 '배트맨' 분위기의 기획에 한창 인기가 치솟은 김흥국을 출현시키면 흥행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1930년대 등장한 '배트맨'이 가면 쓴 영웅이나 슈퍼히어로의 원조라곤 할 수 없다. 그 전에 미국 소설가 존스턴 맥컬리의 '쾌걸 조로'가 있었다. 만화가 허영만은 '각시탈'이 '쾌걸 조로'의 변형이라고 밝힌 바 있다. 검은 가면과 망토를 생각하면 '배트맨'과 '쾌걸 조로'도 유사한 점이 괭장히 많다. 1950년대~60년대도 '가면' 열풍이 불고 지나갔다. 한국 만화로는 박광현의 '푸른 망또', 일본 만화로는 구와다 지로의 '월광가면'이 대중적 인기의 중심에 있었다. '반달가면'은 따지고 보면 '월광가면'의 변형인 듯도 하다. 1994년에는 짐 캐리 주연의 영화 '마스크'가 1990년대형 가면 영웅을 선보였다.
'반달가면'은 내용적으론 좀 부족한 면이 있었지만 비디오의 인기에 힘입어 극장용 영화로 진출했다. 나는 원래 '호랑나비'를 유행시킨 김흥국 자체를 캐릭터 상품으로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에선 가수 소방차같은 인물류가 잘 안팔린 경험이 있어,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대신 '반달가면'의 밑바닥 인기가 만만치 않음을 실감하고 '반달가면'의 상품화 가능성을 타진했다. 전국 비디오 가게를 대상으로 '반달가면'의 인기를 조사하고, 5편이나 되는 시리즈를 죄다 빌려보았다.
마침 일본 만화 '드래곤볼' 열풍이 전국을 강타했다. '드래곤볼'과 경쟁할 만한 한국 콘텐트를 찾던 내 눈에 '반달가면'의 존재가 들어온 것이다. 나는 '반달가면' 피규어를 제작했다. '반달가면'의 빨간 망토를 만들었는데 망토 재질 개발이 덜 되어 다소 구겨짐이 있었다. 영화 출시 타이밍에 맞춰 촉박하게 만들다 보니, 내 생각만큼 잘 만들어진 건 아니었다. '반달가면' 피규어는 그럭저럭 나가는 수준이었다.
'반달가면'는 비디오 영화로는 인기를 끌었지만 극장용 영화로는 부진했다. 동네에 가까운 비디오 가게가 흔하고 어린이들은 집에서 칼라TV 화면의 비디오를 빌려 보는 것이 당연시 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떤 콘텐트든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 결국 가면을 쓴 새로운 한국형 영웅이나 슈퍼히어로가 앞으로도 계속 등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