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41)은 야구 주변부를 맴돌았다. 야구팬, 특히 LG 팬들은 추억 속에서만 이상훈을 떠올렸다. 기타를 치는 이상훈의 모습은 강한 공을 뿌리던 그때와 무척 달랐다. 투수코치 이상훈. 이제 그는 '현실' 속으로 걸어들어왔다.
새로운 둥지 고양 원더스는 이상훈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고양은 '외인부대'다. 프로에 지명받지 못했거나 방출 설움을 겪은 선수들이 모인 곳이다. 김성근(70) 고양 감독은 "이상훈의 개성이, 고양 선수들의 잠재력을 일깨우는 촉매제 역할을 했으면 한다"고 기대감을 표했다.
현역시절 이상훈은 화려했다. 1993년 고려대를 졸업한 그는 당시 프로야구 역대 최고 계약금인 1억8000만원을 받고 LG에 입단했다. 92년 대학리그에서 14타자 연속 삼진을 잡은 강렬함은 프로에서도 여전했다. 2년차인 94년 18승으로 다승왕을 차지했고, 이듬해(95년)에는 20승을 채웠다. 이상훈 이후 20승을 거둔 왼손 투수는 없다. 마무리 보직을 맡은 97년에는 37세이브로 구원왕에 올랐다.
모든 것을 이룬 이상훈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98년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에 입단했고, 2000년에는 미국 보스턴에 진출했다. 그에게 '최초로 한·미·일 야구를 경험한 한국인 투수'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2002년 LG로 복귀한 이상훈은 김성근 감독과 만났다. 당시 LG 사령탑이던 김 감독은 더그아웃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베테랑들을 혹독하게 다뤘다. 이상훈의 '긴 머리'도 처음에는 규제 대상이었다. 이상훈은 "감독님, 머리칼을 기르는 것만 이해해주십시오. 다른 부분은 제 스스로 엄격하게 지켜나가겠습니다"라고 했다. 김 감독은 이상훈의 뜻을 받아들였다. 김 감독은 "개성은 인정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상훈을 믿을 수 있었다"고 떠올렸다.
이상훈의 개성은 다른 지도자들과는 충돌했다. 2004년 LG 코칭스태프와의 마찰 속에 SK로 트레이드됐고, 그해 이상훈은 갑작스러운 은퇴를 선언했다. 록밴드 '왓(WHAT)'의 리더로 새로운 길을 걷던 이상훈은 최근 사회인야구교실을 열어 야구와의 끈을 다시 이었다. 그리고 그의 개성을 장점으로 보는 김 감독과 새롭게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