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각은 꿈을 꾸는 사람이었다. 장각의 꿈은 단순했다. 보다 더 나은 세상, 고통과 굶주림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장각은 거록군 출신의 평범한 백성이었다. 그가 어떻게 태평교단에 가입하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이 당시 우길의 태평도가 크게 흥성해 포교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만큼 장각이 이 가르침에 쉽게 접할 수 있었으리라 추측할 따름이다.
장각은 입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포교에 나섰다. 가시밭길과도 같은 고생길이었다. 따르는 신자가 없어 탁발로 연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각은 어려운 사람을 보면 정성껏 돌보았다. 세상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흉년이 겹쳐 먹고살기가 힘들어진 백성들은 고향을 등지고 유랑민이 됐다. 도적이 판을 치자 선량한 사람들은 더욱 먹고살기가 힘들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역병이 창궐했다. 인심도 각박해졌다.
장각은 남을 도왔다. 굶주리면서도 탁발한 음식을 거리의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아픈 사람을 돌보았다. 약초를 캐어 환약과 약물도 만들어주고 정성껏 치료했다. 주변에 친척이 없어 상을 치를 능력이 없는 고아들이나 과부들을 위해 상례를 치러주었다. 순수한 마음이었다. 그도 누구보다도 극심한 고난 속에 있었기에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눈길이 따스했다.
점차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장각은 남는 물질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병든 환자들을 무료로 돌보아 주었다. 장각이 배운 태평도에는 심신을 다스리는 법과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에 대해 많은 지식이 담겨 있었다. 어느덧 장각의 도가 용하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중한 질병에 걸려도 장각의 교당에 가서 기도하고 약을 먹으면 낫는다는 소문이 퍼졌다. 환자들이 모여들었다. 기적이 일어나서 많은 환자들이 장각의 치료를 받고 나았다. 장각이 신통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신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교세가 확장됐다.
태평교단은 무섭게 성장했다. 날마다 수천 명씩 교도가 늘어났다. 전국에 신도가 수십만에 달해 하나의 조직으로는 관리할 수가 없게 되자, 주·군 단위로 대방과 소방을 두어 교단을 관리하게 했다. 대방은 신도가 일만, 소방은 수천에 달했다. 각 방의 우두머리들은 '방주' 또는 '거수'라 했다. 전국에 방이 36개로 신도가 수십만에 달했다. 장각이 득도를 한 후, 태평도라는 독자 교단으로 포교를 한 지 불과 십수 년만이었다. 장각의 교세가 너무 커지니 본의 아니게 조정과 지방의 관원들에게 의심을 받게 됐다. 사도 양사가 소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장각의 태평도를 해산할 것을 주청했다. 사도부의 관리 유도도 장각의 무리를 처벌할 것을 상주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당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 되자 교단 내에서는 봉기할 것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교단을 확장하는 일은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그 와중에 권력과 재물 욕심에 눈이 어두운 기회주의자들이 너무 많이 조직에 들어와 있었다. 이들 중에 간이 큰 자들은 교단의 증대된 세력에 편승해 세상의 권력을 훔치는 일까지도 손을 대고자 했다. 민중의 고통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확 갈아엎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조정에 대해 반기를 드는 일은 장각으로서도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됐다.
장각은 세상을 구제하려 했다. 장각의 초심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는 것이었다. 세상을 구제하려던 그가 결국은 세상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백성들은 이로 인해 더 큰 고통을 겪게 됐다. 장각이 허영심과 욕망에 져버린 탓이었다.
[영웅의 이면] 태평교와 신라 화랑도의 국선도는 한 뿌리
황건적의 난은 태평교도들이 중심이 돼 일어났다. 태평교도들은 머리에 누런 수건을 쓴 것으로 표식을 삼았다. 세상사람들은 그들을 '황건교도'라고 불렀다. 많은 사람들은 태평도가 장각(A.D ?~184)이 창안한 신흥종교인 줄 안다. 그러나 태평도는 장각 이전부터 존재했다. 태평도는 우길의 가르침에서 비롯됐다. 원래 우길은 후한 순제(A.D 125∼144) 시절의 사람으로서 나름대로 도를 터득해 ‘태평청령서’ 수백 권을 저술해 가르쳤다. 세상에서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이 책 이름을 따서 '태평도'라 했다.
우길의 가르침은 산동지방에 뿌리가 깊은 선도와 방술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원래 선도의 뿌리는 원시 수렵채취 부족의 지식과 기억의 총합에서 비롯됐다. '선(仙)'이라는 글자는 '산(山)' 자와 '사람 인(人)' 자가 결합된 것으로 산사람을 의미했다. 선도란 산악을 무대로 생활하던 원시 수렵채취 부족이 생존을 위해 습득한 지식의 총합을 말하는 것으로 생물의 생육을 포함한 자연에 대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모두 아울렀다. 이것이 나름대로 체계화, 추상화 된 것이 선도로서 일종의 자연철학이었다. 방술 또한 '방(方)' 자의 뜻이 사건과 사상에 딱 들어맞는 해결 방법을 의미하고, '술(術)' 자가 이 해결 방법을 찾아내는 기술을 의미하듯이 자연현상에서 어떤 규칙성을 찾아내어 일상에 적용하려는 일종의 자연과학적 지식이었다. '경방술(經方術: 의술)' '방중술(房中術: 성생활 증진법)' '신선술(神仙術: 불로장생의 방법)' 등이 다 방술의 한 유파이다.
우길은 신선술과 방술을 기반으로 태평도를 만들었다. 우길의 태평도에서 영향을 받아 장각의 태평교와 장릉의 *오두미교가 갈라져 나왔다. 교단체계가 확립되기 이전에 장각과 장릉은 태평도에 입도했고, 나름대로 이를 변형 발전시켜 새로운 교파를 창립했다. 장각의 태평교는 황건적의 난으로 절멸되었으나, 장릉의 오두미교는 그의 손자 장노로 이어져 천사교가 되었다. 천사교는 후일 사상적 체계화를 위해 *황로사상을 받아들임으로써 도교로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신선술과 방술의 원류가 되는 선도는 원래 동이의 사상체계였다. 선도와 방술이 산동성 지방에서 크게 유행했고, 태평도의 창시자인 우길도 산동성과 강회지방을 주무대로 포교활동을 펼쳤다. 이 지방들을 포괄하는 발해만이 동이문화권이었고, 바로 선도의 발생지였다. 따라서 신라의 화랑도에서 말하는 '국선도'와 도교의 원류가 되는 '선도'는 뿌리가 같다. 물론 도교는 그 후 여러 가지 다른 교리와 사상을 흡수해 다른 형태로 변용되었지만.
중국 상해 황푸공원에서 시민들이 태극권을 하고 있다. 장각의 태평교는 태극권에도 영향을 미쳤다.
[거짓말 벗겨보기] 장각이 남화노선에게 받았다는 그 책은?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산에서 약초를 캐던 장각이 우연히 남화노선이라는 도사를 만나 '태평요술'이라는 책을 얻어 득도했다고 한다.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이다. 재미를 위해 지어낸 이야기다. 역사적 기록에는 '남화노선'이란 사람이나 '태평요술'이란 책은 나타나지 않는다. 장각은 우길의 태평도의 무리에서 갈라져 나왔으므로 그가 읽은 책도 우길의 '태평청령서'였을 것이다.
풀이 *오두미교=후한 말기 태평도와 함께 도교의 원류를 이룬 종교. 기도로 병을 고쳐주고 그 사례로 쌀 다섯 말을 받았다는 데서 명칭이 유래됐다. *황로사상=중국 고대의 여러 사상과 신앙전통을 황제와 노자의 이름 아래 융합한 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