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온 환경 때문이었을 거예요. 집이 유복하지도 않았고 단란하지도 않았어요. 아버지는 몸이 불편하셨어요. 어머니는 공장에 다니시며 생계를 꾸리셨죠. 힘들게 살다보니 가족끼리 웃으며 지내는 날도 별로 없었어요. 어린 제 눈에 아버지는 그저 무서운 존재였고 어머니는 너무 불쌍했어요. 그러다보니 저도 미래에 대한 꿈을 꾸거나 희망도 가지지않고 무기력하게 자라게 되더라고요. 그러던 어느날 다니던 교회 누나가 연극을 보러가자고 해서 따라간 적이 있어요. 비좁은 소극장에서 공연을 보다가 '이거다' 싶었죠. 배우들이 무대를 휘어잡고 관객을 웃기고 울리는 모습에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뒤로 인생이 바뀌게 됐군요.
"고등학교 2학년때부터 학교에 흥미를 잃었던 상태였어요. 그 연극 한 편을 보며 태어나서 가장 많이 웃고, 또 많이 울어본거죠. 그만큼 제게는 강한 기억이예요. 그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친구 소개로 '품바'를 공연하던 극단 '가가의회'에 들어가게 됐어요. 그 때부터 2년 반 동안 극단에서 청소만 주구장창 했죠. 5개월간 5만원, 그 이후로 10만원씩 받았어요. 극단을 나올때 받았던 월급은 25만원이었어요.(웃음)"
-뮤지컬도 하셨던데요.
"네, 가가의회에서 나와 뮤지컬 무대에서 코러스를 했죠.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음정희씨, 그리고 김혜자 선생님 등 쟁쟁한 배우들이 나오는 무대에 45명의 코러스 중 한 명으로 출연했죠. 그때 '임꺽정'의 정흥채 형도 저와 함께 코러스를 했어요. 그뒤로 '배울 것도 많고 돈도 된다'는 권유에 아동극도 했어요. 1년 반 정도는 아동극단을 차려 대표로 지내기도 했어요."
-아동극단은 왜 그만두셨어요.
"대표랍시고 무대를 지휘하다보니 제가 아는게 부족하더라고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쯤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이런 일들을 계기로 극단을 접고 기술을 배우려고 공사판을 전전하고 과일상을 하기도 했어요. 아는 형님이 극장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 돌아가게 됐는데 어느날 출근길 지하철에서 누가 두고 간 신문에서 아주 작은 광고 하나를 보게 됐어요. '연희단 거리패' 워크샵 단원 모집 광고였어요. 한달 정도 워크샵에 참석하고 좀 배워보자는 생각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7년을 보냈죠. 그 곳에서 발성부터 손짓 하나까지 다시 배웠어요."
-연극이 왜 좋았나요.
"일종의 해방구였어요. 억눌린 감정을 터트릴수있는 공간을 제게 줬거든요. 또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모여있다는 사실 때문에 즐거웠어요."
▶성공한 아들 못 보고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에 눈물
-부모님이 연기하는걸 좋아하셨나요.
"그럴리가요. 부모님이 제 공연을 보신 건 딱 한번 밖에 없어요. 뮤지컬 코러스로 무대에 오를 때였죠. 이스라엘 병사 역이라 다리를 드러낸 의상을 입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멀리서도 다리통 보고 한번에 알아봤다'고 하시더군요. 그나마 유명한 배우들과 함께 무대에 오른 모습을 보고 '잘 되겠구나'라고 생각해주신것 같아요. 그런데 두 분 모두 제가 잘 된 걸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죠. 지금 제 모습을 보셨어야 하는데…."
부모님 이야기를 하던중 곽도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소주 한 잔을 가득 채워 입에 털어넣으며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회한에 빠지기도 했다. 특히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당시를 회상할 때는 듣고 있는 기자의 마음까지 숙연해졌다.
-고생만 하다 가신 어머니가 많이 그립겠어요.
"아동극단 대표로 있을때 술 한잔 먹고 쓰러져있다 깼는데 삐삐 음성메시지가 가득 차 있는거예요. 들어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누나 목소리였어요. 처음엔 소리를 박박 지르며 '어디있냐'고 하더니 나중엔 기운이 빠져 울면서 '엄마 쓰러지셨다. 빨리와'라고 하더군요. 그러고 돌아가셨는데 그 때 어머니 연세가 쉰살도 되기 전이었어요."
-너무 일찍 돌아가셨네요.
"어머니 유품을 정리하다가 작은 수첩을 발견했는데 거기 제 이름이 세 장에 걸쳐 빡빡하게 적혀있는걸 봤어요. 한글을 잘 모르셨던 어머니가 가족 이름을 쓰면서 글쓰기 연습을 하신거죠. 다른 가족들에 비해 제 이름이 월등히 많이 적혀있더라고요. 그거 보고 며칠을 펑펑 울었어요. 용돈 한 번 드리지 못했는데…. 심지어 집 근처 라면공장에서 나온 부스러기를 모아 죽을 끓여드시기까지 하며 알뜰하게 사셨던 분이예요. 온전한 라면 한 그릇 드시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제가 한을 가질 수 밖에 없죠."
-친척들의 도움도 없었나요.
"친가나 외가나 모두 가난했어요. 셋째 외삼촌은 너무 배가 고파 집을 나가셨대요. 그리고는 갈비집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10년간 그 자리에서 계시며 전문가로 성장했어요. 그리고 그 집을 나갈때 사장님이 대견하다고 갈비집을 차려줬답니다. 지금은 외삼촌네 가게가 '대박집'이 됐어요. 매일같이 손님들이 줄을 설 정도로 잘 되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