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라고 불러도 당신께서 스스로는 '아빠'라고 부르신다. "아빠다" 같은^^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가정이 어려워서 중학교를 어렵게 다니신 정도의 학력을 가지셨다. 8남매 가운데 큰 누나가 계시고 형님이 하나 있고 그 다음 형님은 지금은 병도 아닌 편도선염으로 다섯 살에 세상을 떠났다. 열다섯 살 어린 나이에 서울로 올라와 중화요리 집에서 배달 일과 주방 일을 배워 살아갔다. 그 후 스물이 넘어 우리 고향 충남 보령에 다시 돌아와 남의 집 식당에서 일을 하고 살다 우리 엄마를 만나 결혼을 했다.
난 우리 집이 중국집을 하는 것이 항상 부끄러웠다.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어수선하며 장날이 되면 거지들이 구걸하는 잔칫집 같은 분위기였다. 근데 울 아버지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피리를 부는 거지 아저씨나 노래나 재밌는 우스갯소리를 하는 이들에게는 항상 음식과 돈을 주셨다. 그러다 서울에 유학을 온 나는 더욱 우리 아버지를 부끄럽게 생각했다. 왜? 다른 친구들 아버지는 와이셔츠 입고 집에 가는데 친구들은 중국집 배달원을 보면 '짱께' 라고 비웃으며 말하는 것이다. 우리 집은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시무시하게 큰 식당이었다. 근데 그게 그렇게 싫었다. 그냥 아버지가 회사에 다니지 않은 것이 싫었다.
내가 고2 때 우리 집이 큰 화재에 전소가 되고 나서 아버지는 그 터에 목욕탕과 여관을 지었다. 그 후 나는 내가 목욕탕집 아들이라고 방송에 자주 소개 했다. 그냥 뭔가 깨끗하고 깔끔한 느낌이라서 그랬다.
얼마 전 SBS의 '땡큐'라는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왔다. 차인표가 진행자였다. 나는 SBS '8시 뉴스'의 김성준 앵커·김지수와 함께 참여했고 우리 고향 충남 보령으로 가게 됐다. 한참 녹화가 진행이 되는 가운데 우리 부모님이 등장을 했고 우리 아버지가 직접 잡은 붕어로 어죽을 끓여 주었다. 김 앵커는 성의가 고마운지 두 그릇이나 비웠다. 그 후 울 아버지가 교회에서 배운 색소폰을 연주하는 시간이 있었다. 난 그냥 또 하시나보다 했다. 근데 연기자와 작가들이 눈물을 흘리는 거다. 난 당황했다. ‘왜? 왜 저러지?’
울 아버지는 또 다른 나였다. 한 남자이고 아버지이고 남편이었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겪은 8남매의 아들이다. 큰 형님은 순박하게 농사만 지는 분이시고 동생들의 먹고 사는 것을 고민하는 한 사람의 남자였다. 식당에서 연탄을 아홉 개를 넣은 화로에 자장면을 볶고 탕수육 튀길 때 기름을 팔로 받는 동네 주방장이었다. 그러다 폐 한 쪽의 기능을 상실한 장애가 생긴 노인이었다. 울 아버지가 음계를 알겠나, 8분 음표를 알겠나. 그냥 노력으로 6년 간 배우며 이런저런 곡을 연주하게 된 것이다. 요즘 우리 아버지는 주말마다 교회 지인 자녀 결혼식에 연주를 다니신다. 물론 '남희석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면 더 환영을 한다는 정보가 있다.^^
아버지는 뭘까?
우리 주변에서 보는 아버지는 항상 열심히 일하다 보니 젊음이 갔고 자녀들과 함께 하지 못함을 미안해한다. 그럴 때마다 ‘진즉 잘하지?’라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뭘까?
나도 두 아이의 아빠가 됐는데 아직 아버지는 되지 않은 것 같다. 호랑이 같던 우리 아버지는 어느덧 스마트 폰을 궁금해 하는 소년이 됐다. 아버지는 나를 든든하게 생각하며 곧 칠순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