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태(52)씨는 12년째 잠실구장을 지키고 있는 경비원이다. 2002년 처음 이 직업을 가졌을 때만 해도 "새끼 먹이고, 사는 데 바빠서" 스포츠에 관심이 없었지만, 이제 웬만한 야구규칙은 줄줄 꿰는 팬이 됐다고 한다. 그에게 2013년은 무척 특별하다. '한 지붕'을 쓰고 있는 LG와 두산이 시즌 종반까지 나란히 2·3위를 달리고 있어서다. 그동안 10년이 넘도록 보지 못했던 모습이다. "지난 12년 동안 참 별에 별 일 다 있었죠. 그래도 제가 지키는 잠실야구장에서 두산과 LG가 함께 포스트시즌을 치르는 날을 늘 기다렸어요." 여름 햇볕에 까맣게 그은 김씨가 푸른 그라운드를 바라봤다.
아옹다옹 한 지붕 두 가족
김씨는 잠실벌의 경계인이다. 서울 명문 구단이자 '한 지붕 두 가족'인 두산과 LG를 모두 응원하기 때문이다. '야구의 야'자도 몰랐다던 그는 둘 중 한 팀이 원정경기를 떠나면 경비실에 TV 중계를 켜 놓고 열심히 응원한다. "아휴. 둘 다 좋아요. 두산과 LG가 있어서 제 가족이 먹고 살고, 저도 직업이 있는 것 아니겠어요. 두산과 LG는 제 삶의 반쪽이에요."
하루 12시간씩 2교대 근무. 빡빡한 하루 일정 속에서도 매일 아침 빼먹지 않고 하는 일이 있다. 구장 곳곳의 낙서 지우기다. "어제 밤에는 열성팬들이 빨간색으로 잠실야구장 벽에 감독과 선수 욕을 큼지막하게 써놨더라고요. 혹시 선수나 감독님이 보고 상처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경기에 지장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부지런히 지웠죠." 그래도 최근 5년 사이에 야구장에 여성 팬이 부쩍 늘어나면서 음주나 폭력 사고가 반 이상 줄어들었다고 한다.
양팀 수장들의 스타일 파악도 끝냈다. 하나같이 준수하고, 훌륭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김기태(44) LG 감독님은 선수 시절에 잠실야구장을 드나들 때부터 봤지요. 인간적으로 정말 착하시지만, 그라운드에서는 카리스마가 있는 분이세요. 9개 구단 감독님 중 가장 어리시지만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아요." 두산 지휘봉을 맡은 김진욱(53) 감독은 언제봐도 영국 신사 같단다. "늘 점잖고 매너가 있으신 분이에요. 현장에서 뵈면 정말 빈틈이 없이 꼼꼼한 분 같아요."
지켜본 양팀 감독만 11명
"LG만 해도 김성근, 이순철, 김재박 감독님…." 김씨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폈다. 그동안 그가 지켜본 양팀의 수장만 해도 11명. 1년에 한 번씩은 양쪽 팀 중 어느 한 곳에서 감독 교체라는 평지풍파가 있었다는 얘기다.
2011년 8월 LG 팬들의 청문회 사건은 아직도 생생하다. LG는 그해 5월까지 2위권을 지키며 가을야구 희망을 지폈다. 그러나 7월 이후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화가 난 팬들은 잠실구장 중앙 출입구 앞에 모여 시위를 했다. "원래 모였던 인원은 200명 가량이었는데, 구경꾼까지 포함되면서 500명까지 늘어났죠." 김씨는 오물을 던지고 욕설을 하는 팬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던 박종훈 당시 LG 감독(54·현 NC 육성이사)의 뒷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감독 생활 1년만 하면 까만 머리도 반백이 돼요. 박종훈 감독님이 그날 밤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이는데 머리카락이 죄다 샜더라고요. 참 미남이신데 얼굴에 굵은 주름도 늘었고요."
떠나보낸 감독을 또다시 만나는 기쁨도 크다. 김경문(55) NC 감독은 2011년 시즌 중반 8년간 몸담았던 두산 사령탑에서 사퇴했다. "올해 시범경기를 하는데, 김경문 감독님께서 잠실구장에 들어서셨어요. NC 유니폼을 입고 계셔도 정말 반갑더라고요. 햇수로 따지면 가장 오래 모신 분이거든요. 멀리서 뵙자마자 달려가 손을 잡고 인사를 드렸죠. 현장을 떠났던 분들도 결국은 돌고 돌아 야구장에서 다시 만납니다. 그래서 야구가 인생이라고들 하나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