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아무리 강한 불운도 가족 앞에 선 사나이를 이길 순 없었다. NC 외국인투수 에릭 해커(30)가 시즌 25번째 등판에서 4승째를 따냈다. 태어난 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은 딸이 아버지의 역투를 지켜봤다.
에릭은 올 시즌 불운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26일까지 25경기(선발 24경기)에 등판해 평균자책점 3.85(13위)를 기록했고, 퀄리티스타트 플러스(7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 투구)도 10번(3위)나 기록했지만 챙긴 승리는 고작 3개뿐이었기 때문이다. 3승은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 반면 패는 10개나 됐고, 그 중 완투패도 2번이나 있었다. 팀이 하위권이 머물러 있긴 하지만 유독 에릭이 등판할 때마다 타선이 터지지 않거나 불펜이 승리를 날린 경우가 많아서였다.
그러나 27일 마산 한화전에서는 에릭의 악운이 그를 괴롭히지 못했다. 오히려 운이 좋았다. NC는 1회말 무사 1루에서 마낙길이 친 타구가 유격수 정면으로 가는 병살타성 타구가 됐다. 그러나 한화 2루수 백승룡이 송광민의 송구를 잡은 뒤 1루에 던지는 연결동작에서 공을 놓쳐 선행주자만 아웃됐다. 이후 NC 타선은 3안타를 몰아쳐 3득점에 성공했다. 에릭 자신도 2회 김태균에게 솔로홈런으로 1점만 내줬을 뿐 7회까지 안타 2개로 한화 타선을 철저히 봉쇄해 7회말까지 3-1 두 점 리드를 지켰다.
마지막 고비는 8회. 에릭은 1사 뒤 송광민과 오선진에게 연속 안타를 내줘 1사 1·2루에 몰렸다. 최일언 NC 투수코치는 마운드에 올라가 에릭을 진정시켰다. 이후 전현태가 1루 땅볼을 쳐 2루에서 선행주자가 죽어 2사 1·3루가 됐지만 고동진이 좌전안타를 때려 스코어는 2-3. 그러나 에릭은 이대수를 상대로 초구 슬라이더 후 끈질기게 직구를 던져 헛스윙 삼진을 잡았다. 관중석에서는 환호가 터져나왔고, 에릭은 마운드를 유유히 내려왔다. 8이닝 5피안타 13탈삼진 1실점. 13개의 삼진은 NC 창단 이후 1경기 개인 최다 탈삼진 기록(종전 12개·이재학)이기도 했다. NC는 9회 마무리 손민한이 나와 1이닝을 막고 에릭에게 시즌 4승을 선사했다. 7월30일 문학 SK전 이후 9경기만에 거둔 꿀맛같은 승리였다.
에릭의 승리 뒤에는 가족의 힘이 있었다. 지난 19일 에릭의 아내 크리스틴은 서울의 한 병원에서 딸 칼리 마리를 출산했다. 남편이 한국을 떠나지 않도록 일부러 한국에서 출산하는 배려를 한 것이다. 에릭은 아내 곁에서 딸이 태어나는 모습을 지켜본 뒤 다시 팀에 합류했다. 그리고 크리스틴은 태어난 지 일주일 정도 밖에 지나지 않은 딸과 함께 27일 경기장을 찾아 남편을 응원했다. 아버지가 된 에릭은 한국에 온 뒤 최고의 피칭으로 아내와 딸에게 승리를 선사했다. 김경문 NC 감독은 "그동안 승운이 잘 따르지 않았는데 딸도 태어나고, 승리를 거둬 감독으로서 기쁘게 생각한다. 다음 경기도 잘 던질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딸 이야기에 미소를 지은 에릭은 "매우 흥분된다. 아내와 딸이 같이 온 특별한 날이기도 하고 그들 앞에서 승리해서 평생 잊지 못할 날이 될 것 같다"며 "가족이 경기장에 왔지만 마운드에서는 특별히 다를 건 없었다. 평생 거기서 던졌고, 그것이 내 직업이며 팀이 이기는데 중점을 뒀다"고 말했다. 최다 탈삼진 기록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제구가 원하는대로 잘 되면서 던지는 것에 집중해 좋은 결과를 얻은 것 같다"고 답했다. 에릭은 가족들에게 "야구장에 와 줘서 고맙고, 나의 첫 번째 팬인 아내와 딸에게 이 영광을 돌린다. 사랑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