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구(45)는 올해 참 많은 작품을 내놨다. 7월 '감시자들'을 시작으로 9월에 '스파이', 그리고 10월 2일 개봉되는 '소원'(이준익 감독)까지 하반기에만 무려 세 편의 신작을 내걸게 됐다. 의도치않게 개봉시기가 겹쳤기 때문이지만 팬들의 입장에선 반가운 일이다. 각 작품 속에서 매번 다른 연기를 펼치니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특히 올해의 마지막 작품 '소원'에서는 소방관도 경찰도 아닌 소시민으로 돌아와 절절한 감정연기를 보여준다. 맡은 역할은 성폭행을 당해 장애를 가지게 된 9살 소원이의 아버지 동훈. 분노와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딸의 치유를 돕고 풍비박산이 난 가정의 '일상'을 되찾기위해 애쓰는 인물이다. '소원'은 2008년 발생한 '조두순 사건'을 모티프로 만든 영화. 사회적인 시선을 담고 있지만 '고발'보다 상처받은 피해자 가족들이 치유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 초점을 맞추며 '판타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소재 자체가 가지는 불편함은 어쩔수없다. 이 불편함을 온 몸으로 받아내야했던 설경구가 아프고 힘들었던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올해는 정말 자주 만난다.
"그러게. 매번 내 영화가 극장에 걸릴 때마다 예매권을 사서 주변에 선물로 주는데 이번엔 예매권 사느라 쓴 돈만 대략 1000만원 정도 된다. 세 편을 홍보하기 위해 다닌 무대인사도 100회가 넘는다. 각각 2~3달의 기간을 두고 차분히 촬영했는데 이렇게 줄줄이 개봉일이 잡힐줄은 몰랐다."
-예민한 소재 때문에 '소원'의 출연제의를 받은뒤 망설였다고 들었다.
"굳이 이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야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일단 이준익 감독님이 연출한다는 말에 시나리오를 들고 집에 왔는데 소재 자체가 주는 불편함 때문에 선뜻 읽지를 못하겠더라. 그러던 와중에 아내가 먼저 읽어보더니 '우려했던 것과는 좀 다른 내용이다. 일단 읽어보고 감독님 만나보라'고 하더라. 그 말을 듣고도 세 번 정도를 읽다가 덮어버리기를 반복하며 겨우 내용파악을 마쳤다."
-그러면서도 출연을 결정한 이유는.
"이준익 감독님을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왜 이 영화를 만들려고 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상처를 덮어서 곪아터지게 만드는것 보다 드러내고 치료하는게 맞지 않냐'고 하더라. 유사 사건의 희생자들이 오히려 숨어살며 힘들어하고 있는 현실을 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또 관객에 생각의 여지를 주고 싶다는 의도이기도 했다. 그래도 걱정이 돼 '책임질수 있겠냐'고 물으니 '내가 앞에 서겠다'고 답하더라. 그 말이 믿음직스러워 '해보자'고 했다. 그래놓고는 다음날 후회했다. 번복할까말까 일주일 정도 고민했다."
-촬영전 표현 수위 등을 놓고 이준익 감독과 끊임없이 의견을 나눴다고 들었다.
"소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불편함을 주는 영화다. 굳이 더 디테일한 장면이나 대사를 통해 자극적으로 표현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소원이를 연기한 아역배우 이레도 그런 촬영과정을 감당하기 힘들것 같더라. 병원신에서도 원래는 수술과정에 대한 대사가 구체적이었는데 그런 부분들도 일부 고치자고 제안했고 감독님 역시 받아들였다."
-아역배우 이레와는 어떤 관계를 유지했는지 궁금하다.
"감독님을 포함해 스태프 모두가 이레에게 바짝 신경을 기울였다. 하지만 내 경우엔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감정상태가 많이 복잡했고 연기를 위해서도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잔뜩 날이 서 있으니 오히려 감독님은 항상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려 노력하시더라. 촬영이 신 순서대로 진행됐는데 이레는 사고 장면 촬영 이후부터 잔뜩 침울한 모습을 보이더라. 아동 정신과 전문의가 현장에 나와있었는데도 저러다가 잘못되는게 아닌가 싶은 걱정이 들 정도였다. 다행히 상처분장이 옅어지고 차츰 회복되는 모습을 촬영하면서부터 언제 그랬냐는듯 밝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레가 한번씩 색종이에 손편지를 적어주곤 했는데 그걸 지금도 잘 간직하고 있다."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는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터트리는 것보다 누르는게 맞겠다는 판단이 섰다. 사실 고민이 많았다. 소원이가 다친후 병원에서 엄마 역의 엄지원이 오열하고 나는 억누른다. 그 장면을 모니터한 관계자가 '엄지원 열연 좋다. 형은 아직 밋밋해'라는 말을 하더라. 그 뒤로 감정을 좀 터트리며 보여줄까 싶은 생각을 하다가 결국은 참았다. 우는건 최대한 보여주지 않으려했다."
-실제로 피해 당사자 입장이 되면 기가 막혀 울음이 안 나올수도 있을것 같다.
"아동성폭행 피해자의 아버지 한 분을 촬영 이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분도 딸과 가족 앞에서는 꾹꾹 눌러참았다더라. 그러다 한번 산에 올라가 밤새도록 소리지르고 구르고 뭔가를 때리면서 울분을 터트린 적이 있다고 하더라. 그 분들이 느낀 감정은 '분노'라는 단어로도 부족하다. 사전에서는 그들의 울분을 표현할 단어가 없을거다."
-진정성을 담아 만들었는데 그럼에도 곡해하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다.
"맞다. 열심히 겸허한 마음으로 치열하게 고민하며 만들었지만 보는 사람이 다르게 해석할수도 있다. 그게 참 무서운거다. 이 영화가 가지는 문제의식 때문에 여러 측면에서 말들이 나올수도 있을것 같다. 한편으로 나 역시 이런 문제가 또 발생하지 않게 처벌을 강화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법조계에 있는 친한 동생을 통해 현직 판사들에게도 예매권을 돌렸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