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타격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한 야구 선수가 있었다. 하지만 부진과 불운, 부상이 겹치면서 재능을 꽃 피우지 못하고 비교적 이른 나이(33세)에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6년이 흐른 2013년에 선수가 아닌 코칭스태프로 그가 돌아왔다. 주인공은 바로 강혁(39·SK)이다.
지난달 말 SK가 단행한 코칭스태프 인사에서 파격적으로 2군 감독에 오른 박경완(41) 만큼이나 눈길을 끈 사람이 강혁이었다. 강혁은 박경완을 보좌하는 2군 타격 코치로 임명돼 2007년 은퇴 후 처음으로 현장에 복귀하게 됐다. 그는 "야구단에서 먼저 콜(코치직 제안)을 해주셨다. 다른 코치에 비하면 젊은 축에 속하지만 열심히 하겠다"며 "선수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유소년을 가르치다 프로로 가는 거여서 위로 올라가는 느낌"이라고 반겼다.
"시원섭섭하다"고 밝힌 강혁의 말처럼 선수-은퇴-코치 복귀로 이어지는 그의 야구 인생은 드라마 그 자체다. 신일고 시절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하며 빼어난 타격 능력을 선보였던 강혁은 1993년 대학(한양대)과 프로(당시 OB)간의 2중 등록으로 물의를 빚어 한국야구위원회(KBO)로부터 영구제명 처분을 받았다.
이후 2년간 실업팀(현대 피닉스)을 전전하다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을 계기로 복권됐지만 부상으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1999년 두산에 입단할 때 받았던 계약금이 무려 5억7000만원이었지만 부진한 성적과 맞물려 먹튀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2001년 SK로 현금트레이드 된 후에는 병역 비리를 저지른 게 드러나 2004년 면제가 취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공익근무요원으로 군복무를 마친 강혁은 소집해제 후 2007년 복귀했지만 10경기서 7타수 무안타에 그친 후 방출됐고, 조용히 그라운드를 떠났다.
은퇴 후 2년여를 방황하다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했던 인천 남구청과 인연이 닿아 2009년 창단한 리틀야구단의 감독직을 맡았다. 그는 "창단을 직접 추진했었다"며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가르쳐야 했다. 인성도 마찬가지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4년 동안 지도하다 보니 프로 선수들을 가르치는 건 전혀 힘들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4년이라는 시간과 추억, 나를 믿고 따라왔던 선수들과 어머니들에게 미안하다"며 "지도하고 있는 선수들을 놔두고 간다는 것에 여러 생각이 많았다"고 돌아봤다.
강혁은 4일 SK 2군에 합류했다. 하지만 리틀야구 대회도 함께 나서는 중이다. 그는 "대전에서 열리는 박찬호배 대회에 참가 중"이라며 "좋은 성적을 마지막으로 선물해주고 싶어서 SK에 양해를 구했다. 박경완 감독도 '하던 일 잘 마무리하라'고 했다"고 귀띔했다.
SK로의 복귀는 쉽지 않을 듯 했다. 현역 시절 은퇴의 길로 내몰았던 구단이 SK였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강혁은 "구단이 나를 그동안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며 "떠나갔던 선수를 다시 고향으로 부르는 건 쉽지 않다. 여러 가지 면에서 고맙다"고 감사함을 전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실전이다. 리틀야구와 프로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강혁도 "선수에 맞는 폼과 타격을 전수하는 게 중요하다"며 "비록 꽃을 피우지 못했지만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선수들에게 잘 지도하고 전수하고픈 마음"이라고 의욕을 다졌다. 이어 그는 말했다. "그(아마시절 들었던) 천재성을 지도로 발휘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