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와 아이들은 당시 3집에서 '발해를 꿈꾸며'와 '교실 이데아'를 연달아 히트시켰다. 이들은 다룬 연예 채널뿐이 아니었다. '교실 이데아'는 교권에 대한 반항, '악마주의' 논란까지 야기시키며 지상파 뉴스에도 등장했다. 이들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들이 뉴스가 됐다.
연세대 농구부 역시 뜨거웠다. 이상민·우지원·문경은·서장훈을 앞세워 허동택 트리오(허재·강동희·김유택)가 건재한 '킹' 기아 자동차 농구단과 '맞장'을 떴다. 도무지 허물어지지 않을 것 같던 '기아 왕조'를 젊음과 패기, 수려한 외모로 꺾었다. 수백명의 '오빠부대'를 끌고 다녔다.
그렇게 떠들썩했던 1994년, 조용하지만 누구보다 눈부셨던 또 한 명의 주인공이 있었다. 그해 연말 4집을 들고 컴백한 신승훈이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이라는 명곡을 썼고 '오랜 이별 뒤에''어긋난 오해' 까지 연달아 히트시켰다. 전곡을 자작곡으로 채우며 본격적인 싱어송라이터 시대를 열었고 200만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기록했다. '발라드의 황제'가 탄생하던 순간이었다.
그 후로 19년이 흘렀다. 강산이 두 번은 바뀔 시간이란 벽 앞에 그 때 그 스타들도 많이 변했다. 서태지는 한 번의 비밀 결혼과 이혼, 이어진 또 다른 결혼 등 사생활과 관련된 '이슈'로 뉴스에 자주 등장한다. 연세대 농구부 역시 프로농구 출범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 당시의 인기가 한 풀 꺾였다.
하지만 신승훈 만은 꾸준했다. 한 때 음악이 듣기 싫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음악을 놓지는 않았다. 그리고 2007년 10집 활동을 마감하면서 음악적 일탈을 선언했다. 20년간 음악을 했고, 앞으로 20년간 음악을 더 하기 위해 중간점검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쓰리 웨이브스 오브 언익스펙티드 트위스트'(3 Waves of Unexpected Twist)란 타이틀로 6년간 3장의 연작 앨범을 펴냈다. 신승훈표 발라드에서 조금 벗어나 록·힙합·알앤비·재즈·디스코 등 여러 가지 장르적 실험을 거듭했다. 위험할 수 있지만 용감한 도전이고 발상이었다.
그리고 9일에서야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단독 콘서트 '2013 더 신승훈 쇼-그레이트 웨이브'를 통해 6년 간의 고민과 성장을 팬들 앞에 고백했다. 팬들의 기다림에 대한 납득할 만한 보상이었다. 화려하고 웅장하면서 짜임새 있는 뉴욕 브로드웨이 뮤지컬 한 편 감상한 기분이 들었다. 브로드웨이에서 1988년 초연돼 지금까지 사랑받는 '오페라의 유령' 같은 웰메이드 스테디셀러의 탄생을 예감했다. 자신의 공연 게런티와 전국 투어를 포기하면서까지 집중한 '단 한 번의 무대'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댄서들의 춤사위와 조명·영상 등이 모두 완벽하게 분위기와 어울렸다. 무대 위를 가로지르는 무빙워크를 설치하고 회전목마를 세웠다. 크레인에 올라타 관객들 머리 위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음악이 훌륭했다. 60인조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가을밤의 축제였다. 1990년 데뷔해 23년간 발표한 히트곡이 즐비해, 꽉 찬 레퍼토리가 빈틈없었다. 통기타를 치며 '오랜 이별 뒤에'를 팬들과 추억했고, 최신곡 '쏘리' 역시 팬들의 함성 속에 대형 공연장에 울려퍼졌다. 신승훈 역시 쾌조의 컨디션으로 맘껏 보컬 능력을 뽐냈다. '보이지 않는 사랑''그 후로 오랫동안' 등 발라드 명곡으로 무대를 마무리하면서는 팬들을 1994년 추억 속으로 초대했다. 체조경기장을 가득 채운 1만여명의 관객들은 신승훈의 음악적 동반자였다. 신승훈의 눈빛만 봐도 다음 멘트를 예측하고 율동을 따라할 정도로 호흡이 척척 맞았다. 1990년 가수 신승훈으로 데뷔해, 뮤지션을 넘어 아티스트를 향해가는 신승훈의 고된 길이, 그리 고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됐다. 그는 "여러분의 추억 속에 단 한 곡이라도 내 노래가 있다면 그 분은 나의 팬이다"라는 말로 추억 여행을 마무리했다. 이날 공연 뒤 신승훈의 대기실에는 놀랍게도 '응답하라 1994'의 여주인공 고아라와 그녀의 모친이 찾았다. 모녀는 팬이라며 다정하게 신승훈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지금까지 신승훈의 음악생활, '그 후로 오랫동안' 울려퍼질 신승훈의 음악들에 대한 기대감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새 앨범 ‘그레이트 웨이브’를 발표했다.
"10년 뒤에 인터뷰를 한다면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시간이 지금이었다고 얘기할 거다. 10집까지 발표하면서 신승훈이 힘이 빠졌다는 이야길 들었다. 활동도 안하고 음원도 잘 안되고 사실 그랬다. 가수로서 치명타일 수 있는데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다행이 팬들이 참아준 거 같다."
-6년이라는 긴 시간을 쏟아부었다.
"2~3년 정도 음악을 끊었던 적이 있다. 음악만 들었던 내가, 음악을 놓아버린 거다. 어떤 곡을 들어도 감흥이 없는 거다. 근데 그 때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말을 이해했다. 일단 백지상태에서 브리티시록부터 힙합까지 파고 들어갔다. 1집부터 10집까지 발표한 뒤 나온 3장의 미니앨범은 내 음악 생활의 에필로그다. 앞으로 하게될 음악이 프롤로그가 될 거다."
-앞으로 할 음악에 대한 구상은 끝났나.
"힌트는 얻었다. 조용필 선배가 이번 앨범으로 후배들에게 던진 메시지가 있다. 굉장히 예외였는데 많이 비우고 나오셨더라. 악기를 6개 밖에 쓰지 않았는데도 굉장히 훌륭한 사운드가 나왔다. 단순히 젊게 나왔다가 아니라, 많이 비우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볼거 다 해보신 뒤에 이런 결론이 나온 거다. 나도 많이 배웠다."
-신승훈은 공연형 가수다.
"가수는 음악, 곧 공연으로 가야한다. '더 신승훈 쇼' 역시 9년째 오고 있는데 이번 공연이 시즌2의 마지막 공연이다. 세종문화회관에서도 오케스트라와 공연해봤고, 체조경기장에서 블록버스터급 공연도 해봤다. 아트홀에서 작은 공연도 해봤는데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엄청난 제작비를 썼다. 오케스트라부터 코러스까지 무대 위에만 100여명이 올라왔다."
-보컬이 진화했다는 이야길 많이 듣는다.
"전에는 무작정 슬프게 불렀다. 근데 담백해야 오래 갈 수 있다는걸 알았다. 최근에는 슬픔을 승화시킨 목소리가 나온다. 박진영이 말하는 '공기반 소리반' 같은 거다. 내가 노랠 어떻게 부르는지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다. 작곡가로서 완성된 목소리가 지금이라는 생각이든다."
-더 이상 작사는 안한다.
"철이 들어서 그런다. 내 나이가 몇인데 '쏘리' 같은 가산 더 이상 못 쓴다. 예를 들어 '가잖아'라는 곡이 있으면 '가잖아 이젠 떠나가고 있잖아' 정도까지는 써준다. 그럼 내 분신같은 심현보가 이후의 이야길 만들어 오는 식이다."
-이번 앨범을 내고 홍보를 많이 하지 않았다.
"사십이 넘은 가수가 더 이상 홍보랄게 뭐가 있을까. 가수들이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별로 없다. 근데 11집 때는 지금처럼은 하지 않을거다. 이번에 '히든싱어''불후의 명곡'에 출연한 것도 앞으로의 활동의 힌트가 될 것이다. 언젠가는 음악에 관련된 프로그램도 진행해보고 싶다."
-후배 양성 계획도 있다고.
"회사 앞 건물 5층을 통으로 빌려서 녹음실·연습실을 만들었다. 지금 연습생이 3명 있는데, 내가 직접 가르칠 생각이다. 근데 너무 시스템적으로 가면 개성이 죽을 수 있다. 우리 연습생들 같은 경우에는 개성을 살려주는 쪽으로 연습을 시킬 계획이다. 박진영·양현석·이수만 선배도 자신만의 트렌드가 있다. 나도 내 트렌드로 해보고 싶은 게 있다. 제작자 신승훈이 아닌, 프로듀서 신승훈으로 일 해보고 싶다."
-일본 공연을 앞두고 있다.
"12월 26~27일에 공연이 잡혔다. 어떤 큰 성과를 얻으려고 가는 건 아니다. 3년 전에 일본 팬들이랑 제주도에서 팬미팅을 하는데, 울더라. 왜 일본에 안 오냐고, 이제 곧 갈거라고 했다. 2004년에도 일본 시장이 불모지라 갔다. 지금은 아이돌이 케이팝 시장을 흔들고 있는데 고무적이다. 그러다보면 발라드도 찾고 밴드 음악도 찾는 날이 오게 될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