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 조례동에 있는 성암정돌솥밭은 식사 시간엔 빈자리가 많지 않다. 성암정돌솥밥은 남도에서도 손맛으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맛의 도시 순천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맛집이다. 김천만(57)·박종옥(54) 부부는 손맛뿐 아니라 선행으로도 소문이 자자하다. 5년 전,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순천 성신원에 있는 학생들에게 매월 50만원씩 기부하고 있다. 밖으로 알려진 것만 그렇다. 김천만 사장은 스무 살이 되기도 전, 첫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 어려운 아이들을 도왔다. 지난해 혈액암 판정을 받았지만 나눔에 대한 그의 생각은 변함없다. “이것 저것 제하고(빼놓고) 남는 것으로 남 도우려면 못 하지요.” 김 사장은 항암제 투여로 기력이 쇠해 쇳소리를 내면서도 또렷하게 답했다.
김 사장이 쓴 나눔의 역사는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974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곧바로 지적공사 시험을 보고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땅을 보러 다니는 직업이라 여수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게 됐는데, 여수의 달동네인 충무동 일대를 자주 방문했다. 사정이 딱한 아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런 집을 볼 때마다 눈도장을 찍어놓은 후 재방문할 때면 옷과 음식 등 생필품을 조용히 문간 앞에 두고 왔다. 당시만 해도 말단공원 월급을 두고 ‘쥐꼬리’라는 표현을 쓰던 때다.
“길 가다가도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그냥 눈물이 나오고 그러더라고요. 사실 당시엔 저도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는데도 말이죠. 나도 어렵게 커서 그런가 봐요.”
15년 전, 여수에서 고향인 순천으로 이주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더 이상 객지에 있을 필요가 없겠다 싶어서다. 아내는 여수 시절에도 자그마한 음식점을 했는데, 순천으로 온 이후 돌솥밥 음식점을 냈다. “고깃집은 남자가 도와야 하지만, 돌솥밥집은 아내 혼자서도 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고향에 오니 마음도 넉넉해지고 음식점도 비교적 잘 됐다. 이때부터 정기적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일을 찾아나섰다. 평소 김 사장의 선행을 잘 알고 있는 선배가 순천시청 복지과 직원을 소개했다.
“시청 복지과에서 보육원에 물품을 보내고 있었는데, 아마 넉넉하지 않았나 봐요. 그래서 복지과에서 ‘이번 달엔 이런 게 필요하다’ 요청이 오면 40명의 운동화, 음식, 옷을 사서 보냈지요. 제가 물품을 직접 사서 전달했어요. 지금 과장으로 계시는 분이 계장일 때부터 알았는데, 실제 얼굴을 본 건 몇 년 안 됐어요. 시청에서 전화 오면 배달하는 역할이었지요.”
순천시청 여성가족과 박정숙(55) 과장은 “김천만 사장을 알고 지낸 지 15년이 훨씬 넘었는데, 정말 한결같아요. 복지과 직원에게는 천사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지난 2003년, 김 사장은 복지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김 사장은 지난 2007년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나이 오십이 넘어가면서 ‘몸이 힘들다’는 생각이 자꾸 들고, 그래서 ‘이제는 좀 쉬면서 살자’라는 생각으로 인생 2막을 준비했다. 가게 일을 도우면서 짬짬이 텃밭을 가꾸고, 아내와 노년을 보낼 집도 한 채 지었다.
그러던 차, 지난해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난데없이 혈액암 판정이라는 청천벽력을 맞은 것. 혈액암은 항암제 치료가 가능해 병원 생활은 하지 않아도 되지만, 매일 약을 달고 살아야 한다. 또 힘든 노동이나 운동은 피해야 한다. 평생 남을 도우며 살았는데도 암 판정을 받아, 야속한 마음이 들 것 같기도 하지만 김 사장은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런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죠. 하지만 의사선생님 말이 혈액암은 약만 잘 먹으면 나을 수 있다고 하니까. 그만한 것이 나에게는 복이다, 그동안 남 힘들게 하지 않고 살아왔으니까 이길만한 시련을 나에게 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힘든 투병으로 만사가 귀찮을 만도 하지만, 나눔에 대한 생각은 변함없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부끄럽지만, 기부라는 것이 꼭 큰 돈을 내는 게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