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각은 위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하려는 웅대한 포부를 지녔다. 손권 이래 동오는 북방 위나라에 대해 늘 수세적인 입장이었다. 동오 사람들은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지 적극적으로 위나라와 싸워 천하를 쟁패할 뜻이 없었다. 제갈각만이 유일하게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동오의 실권을 장악한 후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 대대적으로 북벌에 나선다. 북벌 실패 후 국내의 민심이 이반하자 그는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강경책으로 일관하다 결국 비참하게 패망하고 만다.
제갈각은 동오의 *원훈 제갈근의 장남으로 제갈량에게는 장조카가 된다. 제갈각이 적극적으로 북벌에 나선 것은 그가 숙부인 제갈량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북벌의지를 널리 알리고자 쓴 논설에 이와 같은 대목이 있다.
“옛날 형감이 공손술에게 진취적으로 나아가 적을 도모할 것을 설득한 것과 근래에 나의 숙부 제갈량이 출사표를 올려 적과 천하를 쟁패하는 계책을 진술한 것을 읽어볼 때마다 나는 매번 감탄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이와 같은 일을 생각하느라 밤부터 새벽까지 전전반측 잠을 이루지 못하곤 한다.”
이를 보면 그에게 제갈량의 유지를 이어받고자 하는 뜻이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제갈각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해 손권의 총애를 듬뿍 받았다. 제갈각은 고담·장휴·진표 등 동오의 젊은 인재들과 함께 손권의 태자 손등의 벗으로 발탁됐다. 세상에서 이들을 ‘4우’라고 불렀다. 동오정권의 차기 실세로 일찌감치 낙점된 셈이었다.
장수가 된 제갈각은 단양군의 깊은 산중에 할거하고 있던 산월족들을 토벌해 4만 명의 병력을 징발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이었다. 이 공으로 그는 자력으로 열후의 신분에 올랐다. 당시 대부분의 동오 명문가 자제들이 부친의 작위와 지위를 세습하곤 했던 것과 비교된다.
제갈각은 태자 손화와 노왕 손패 사이의 유혈낭자한 후계경쟁 속에서도 교묘하게 처신해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손권의 말년 동오는 국가를 맡아 운영할 만한 인재가 제갈각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치열한 정쟁과 손권의 견제로 인해 다른 경쟁자들이 모두 숙청됐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제갈각은 14세의 어린 후계자 손량을 보필하라는 손권의 유조를 받아 국정을 장악할 수 있었다.
국권을 쥔 제갈각은 북벌의 꿈을 실현해 보고자 했다. 사마사의 선공을 동흥싸움에서 격파함으로써 기세가 오른 그는 동오가 동원할 수 있는 총 병력인 20만 대군을 일으켜 대대적인 북벌에 나서게 된다. 동오로서는 처음 시도하는 대담한 모험이었다. 당연히 위험부담이 컸으며 조정 내외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제갈각은 작은 나라인 오나라가 큰 나라인 위나라를 이기는 방법은 상대방이 분열된 틈을 노려 일거에 승부를 결정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위나라는 때마침 사마씨의 쿠데타로 내부적 균열이 있었다.
그의 군대가 합비 신성에서 참패하자 그의 권력기반은 급속히 무너져 버렸다. 결국 그는 손준의 궁정쿠데타에 의해 참살되고 만다. 동오의 관리와 백성들은 장기적인 전시동원체제 하에서 지칠대로 지쳐 편안한 휴식을 원했다. 민심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온 백성을 전선으로 몰고 간 것이 그의 결정적 패인이었다.
제갈각의 숙부 제갈량이 넘너들었던 관문인 사천성 검문각. 여기서 당 수도가 있던 장안(지금의 시안)으로 이어지는 길이 ‘촉도’다. 절벽에 구멍을 내 나무를 박은 뒤 그 위에 길을 내 잔도가 곳곳에 남아있다. 이제현이 충선왕의 명령을 따라 오고 간 길이다. IS포토
[영웅의 이면] 육손, 제갈각의 재능 걱정했다
손권이 제갈각(A.D 203~253년)을 총애한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재능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제갈각이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제갈각의 부친 제갈근은 얼굴이 길어 나귀와 비슷했다. 한번은 큰 잔치를 벌였는데, 평소에 농담을 좋아하던 손권이 제갈근을 골려주고자 나귀 한 마리를 연회장에 끌고 들어오게 했다. 나귀의 길쭉한 면상에는 ‘제갈자유(諸葛子瑜)’라 쓰여 있었다. 연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이를 보고 박장대소를 했다. 제갈근의 얼굴이 벌개지자 마침 술시중을 들고 있던 제갈각이 손권에게 나아가 절을 하고 말했다.
“청컨대 두 글자만 더 첨가하게 해 주십시오.”
손권이 허락하자 제갈각이 ‘제갈자유’란 넉자의 글자 밑에 ‘지로(之驢)’ 두 글자를 첨가했다. 졸지에 나귀는 제갈근에서 제갈근의 나귀로 바뀌었다. 연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모두 좌석에서 일어나 재갈각의 재치에 환호했다. 손권도 함께 웃고 즉시 그 나귀를 제갈각에게 하사했다.
또 한번은 손권이 제갈각에게 물었다.
“경의 부친과 숙부(제갈량) 중에서 누가 더 현명한가?”
제갈각이 대답했다.
“신의 부친이 더 우수합니다.”
손권이 의아해하자 제갈각이 대답했다.
“신의 부친께서는 이 일을 아실 것이고 숙부께서는 모르실 것이니 부친이 더 낫다 한 것입니다.”
손권이 또다시 크게 웃었다. 이외에도 제갈각은 여러번 손권 앞에서 재치를 뽐내었다. 손권은 제갈각이 재치와 임기응변에 뛰어난 것을 보고 그를 매우 영민하다 여겼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제갈각의 인물됨을 높게 평가한 것은 아니다. 육손은 제갈각이 너무 재주만을 믿고 자만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나는 지금까지 선배들을 받들어 반드시 함께 지위가 올랐고 나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부축하고 도와주었다. 지금 그대를 보니 윗사람을 능멸하고 아랫사람은 멸시하니 이는 덕을 쌓아 일신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는 태도가 아니다.”
그의 부친 제갈근도 제갈각이 재주만 앞세워 무리한 일을 벌이는 것을 걱정하곤 했다.
“제갈각이 우리 집안을 크게 흥하게 하기는커녕 장차 우리 일족을 크게 망하게 할 것이다.”
과연 제갈각이 참살됐을 때 그의 일족 모두 멸족을 당했다. 동오에서 제갈근의 후손이 끊어지게 된 것이 다 제갈각의 탓이었다.
[거짓말 벗겨보기] 제갈각, 20만 대군 쉽게 모았다고?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각이 동흥싸움에서 사마사의 군대를 격파하고 난 후 즉시 20만의 대군을 불러 모아 북벌에 나섰다고 한다. 사실과 다르다. 당시 동오의 국력으로 그 정도의 대군을 그렇게 쉽게 모을 수 없었다. 제갈각은 동흥싸움 후 동오로 돌아왔고, 승전의 기세를 등에 업고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린 후에야 20만의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격렬한 찬반논쟁이 있었으며 이것이 제갈각의 권력기반을 약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