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볼긱이 야구 마니아 여러분의 질문을 받습니다. 우리는 까다롭습니다. 평소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자주해 긱(GEEK, 괴짜)이라 손가락질 받던 여러분! 세상 누구도 묻지 않았던, 살아있는 질문만 받습니다. 엄격한 질문 선별 과정을 거쳐 긱(GEEK)의 시각에서 진지하게 답변해드리겠습니다. 베이스볼긱은 일간스포츠가 만든 최초의 모바일 야구신문입니다. [안드로이드폰 다운로드] [아이폰 다운로드]
Q. 분당에 사는 20년차 야구팬입니다. 어제 술자리에서 친구와 멱살잡이를 했어요. 저는 야구를 보면서 단 한번도 1-0 경기가 재미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야구는 뭐니 뭐니 해도 화끈한 타격전이 펼쳐져야 제 맛이죠. 근데 친구 녀석이 자꾸 1-0이 제일 재밌다고 우기네요. 평소 서운했던 감정까지 겹치다보니 그만... 어쨌든 야구에서 가장 재미있는 점수는 몇 대 몇 인가요? 타격전 맞죠? (분당 요기 베라)
A. “당연히 축구는 펠레 스코어(3-2), 야구는 케네디 스코어(8-7) 아닌가요?”
십중팔구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옆에서 듣던 일반 상식 책을 열심히 읽은 누구는 이렇게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보위 쿤 스코어, 커미셔너 스코어라는게 있는데 말이야. 야구는 7-6정도가 딱이야. 보위 쿤이란 사람은 20년 가까이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를 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 전문가지. 그리고 8점 넘게 나면 시간도 길어지고 지루해져.”
야구 스코어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건 바로 케네디 스코어입니다. 사실 야구에서 8-7이 자주 나오는 점수는 아닙니다. 2013 한국프로야구에서는 총 576경기가 열렸습니다. 이 중 8-7은 7경기, 비율로 치면 1.2% 정도입니다. 한 달에 한번 꼴로 나오는 아주 희귀한 점수입니다.
케네디 스코어는 널리 알려진 대로 케네디 대통령이 “야구는 8-7이 가장 재밌다”고 말한대서 유래했습니다. 중앙일보 기사 데이터베이스(DB)를 뒤져보니 1993년 케네디 스코어가 처음으로 언급됐습니다.
“삼성과 LG의 승부가 엇갈린 8-7의 점수는 야구경기중 가장박진감 넘친다는 케네디 스코어. 케네디 스코어는 미국의 35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1917~1963)가 재임시 야구경기는 8-7이 가장 재미있다고 기자들에게 말한데서 유래됐으며 63년부터 야구잡학사전에 등장했다. 케네디대통령의 이같은 말은 제32대 프랭클린 D 루즈벨트대통령(1882~1945)이 프로야구 개막전 시구직후 야구경기는 9-8이 가장 재미있다고 말한 것에서 한점씩 뺀 것(9-8은 루스벨트 스코어로 부른다)” 중앙일보 1993년 9월 15일자 ‘<알아야재미있다> 케네디스코어’
경향신문에서는 중앙일보보다 7년이나 앞선 1986년 4월 1일자 신문에 케네디 스코어를 처음 사용했습니다. “대학야구 봄철리그 결승전에서 원광대가 동국대를 이긴 경기를 보도하면서 케네디 스코어인 8-7로 승리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후 기사를 검색해보면 케네디 스코어는 ‘8-7’을 수식하는 고유 명사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취업준비생들이 보는 일반 상식 책에도 나와 있으며, 실제 취업 시험에서도 케네디 스코어와 관련된 문제가 출제되고 있습니다. 또 지상파 퀴즈 프로그램에서 케네디 스코어는 프로그램 초반, 누구나 다 맞추는 아주 쉬운 문제로 출제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케네디 스코어를 모르면 상식이 부족한 사람으로 낙인 찍힐 정도입니다.
‘8-7’은 케네디 스코어가 아닌 루즈벨트 스코어
케네디 스코어의 유래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검색을 해봤습니다. 국내 검색 엔진에서는 다양한 자료가 나오지만, 외국 사이트에서는 검색어를 넣고 아무리 뒤져봐도 케네디 스코어란 단어를 확인하기 어려웠습니다. 야구 용어를 정리해 놓은 폴 딕슨의 ‘베이스볼 딕셔너리(Baseball Dictionary)’에도 없었습니다. 뉴욕 타임즈나 워싱턴 포스트 같은 미국 내 유력 매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1960년 대선 토론회에서 한 말’이라는 단서를 갖고 1960년 에 나온 관련 기사를 찾아봤지만 야구에 대한 언급조차 발견하기 어려웠습니다.
국내 야구 용어 중 일본에서 건너온 정체불명의 단어들이 많다는 점을 생각해 일본 사이트도 뒤져봤지만 소용없었습니다. 10년 넘게 야구 기자 생활을 해온 선배들에게 물어보니, 역시 답변을 곤란했습니다. 한 선배는 일단 “국내 기자들이 만들어낸 단어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아니면 누군가 어디서 슬쩍 들은 이야기를 확인 없이 신문에 그대로 실었을 수도 있답니다. 아무래도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는 이런 풍문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케네디 스코어를 추적하던 중 놀라운 자료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편지 한 장이었습니다. 1937년 1월 25일 루즈벨트 대통령은 당시 뉴욕 타임즈 야구 담당 기자였던 제임스 P. 도슨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도슨이 루즈벨트 대통령을 전미 야구 기자 협회의 14번째 연례 만찬에 초대한 것에 대한 답장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팽팽한 투수전도 좋아하지만, 홈런이 터지며 큰 점수가 나는 경기에 희열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경기(my idea of the best game)는 '8-7'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재밌는 사실은 이 편지의 원본을 Plaza57이라는 귀금속 감정 회사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 편지는 이베이(e-bay)에 19만 5000달러(약 2억 600만원)라는 가격까지 책정돼 있습니다.
약간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케네디 스코어는 결국 케네디 대통령이 아닌 루즈벨트 대통령이 한 말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쓰는 점수 관련 단어들 … 진짜 재밌는 점수는?
특정 점수를 지칭하는 용어는 아니지만, 1점차 승부처럼 팽팽한 접전을 뜻하는 표현은 미국에도 있습니다. 시소게임(Seesaw Game)이 바로 그것입니다. 1892년 시카고헤럴드 에드워드 니콜스에 의해 처음 사용된 이 단어는 폴 딕슨의 ‘베이스볼 딕셔너리’에도 나와 있습니다. 한 팀이 점수를 내면 다른 팀이 곧바로 점수를 내며 따라붙는, 마치 시소와 같이 접전이 계속되는 게임을 의미합니다.
또, 동사 'Edge'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파드리스가 자이언츠를 12회 에러로 8-7 승리를 거뒀다.(Padres edge Giants 8-7 in 12 innings on error.)”처럼 ‘Edge’는 근소한 점수 차의 경기, 특히 1점 차로 승부가 갈렸을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Hair-raising game'이란 단어도 있습니다. 머리카락이 곤두설만큼 짜릿한 경기라는 뜻입니다. 1990년 해롤드 시모어가 쓴 ‘Baseball: The Poeple's Game'이란 책에서는 9-8 경기를 설명하면서 ’Hair-raising game'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 역시 시소게임과 마찬가지로 그리 많이 사용되진 않습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점수와 단어들은 재밌는 경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난타전’과 ‘1점차 승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양 팀 각각 6~9점 사이의 점수 뽑는 난타전이 펼쳐지고, 1점차로 마무리되는 경기에 사람들은 재미를 느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 ‘단어’에서 찾은 답변입니다.
선수들이 재밌어하는 경기는?
선수들에게도 질문해 봤습니다. 아무래도 직접 경기를 하는 입장에서는 일반 팬들과는 생각이 조금 다를 것 같았습니다. 두산 1루수 최준석은 “타자라서 그런지 양 팀 방망이가 많이 돌아가서 높은 점수가 날수록 경기가 재밌고 짜릿하다”고 합니다. 특히 적시타나 홈런이 터지면 더욱 그렇답니다.
최준석은 “케네디 스코어 같은 특정 점수를 내는 경기가 더 짜릿하거나 매력적인 건 아니다”며 “아슬아슬한 게임, 역전 게임이 스릴 있고 재밌다”고 합니다.
역대 프로야구에서 가장 점수가 많이 난 경기는 2009년 5월 15일 당시 히어로즈와 LG의 목동 경기였습니다. 이날 경기에서는 LG가 22-17로 승리했습니다. 4시간 40분동안 진행된 이날 경기에서는 양 팀 합계 11개의 홈런이 터졌으며, 투수는 13명이 등판했습니다. 한 경기 최다 홈런은 2000년 4월 5일 현대와 한화의 경기에서 나온 14개입니다. 이날 경기에서는 현대가 10개, 한화가 4개의 홈런을 터뜨렸습니다. 최준석 입장에서는 재미를 느낄만한 경기들입니다.
두산 투수 유희관 역시 “무슨 점수가 가장 짜릿하다. 그런 거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다”고 합니다. 유희관은 “주자가 나가있는 상황이 가장 긴장되고 그런 순간을 잘 막아냈을 때 가장 짜릿하다. 상식적으로 한 쪽이 일방적으로 이기고 점수차가 많이 나는 게임은 스릴감이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유희관은 역시 소문대로 1-0처럼 팽팽한 투수전에 짜릿함을 느끼는 강심장입니다. 미국에서는 이를 ‘피처스 듀얼(Pitcher's Duel)’이라고 합니다. 투수들의 압도적인 피칭으로 점수가 나지 않은 투수전을 의미합니다. 2013년 프로야구에서 1-0 경기는 는 총 11번이 나왔습니다. 프로 원년부터 2012년까지 1-0 경기는 총 312경기로 이를 전체 경기수로 나눠보면 2.2%가 나옵니다. 역시 자주 볼 수 있는 점수는 아닙니다.
윤병웅 한국야구위원회(KBO) 기록위원장은 2013년 한 칼럼에서 “근래에 들어서는 특급 투수들의 숫적, 양적 부족으로 완투경기의 급감은 물론, 1-0 경기 빈도수 자체도 전에 비해 현격히 줄어드는 양상”이라며 “홈런이 야구의 꽃이고 치열한 타격전이 훨씬 보는 재미가 더하다고 하지만, 1점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양 팀간의 팽팽한 줄다리기 투수전은 경기의 질이나 긴장강도에 있어서 만큼은 최고 등급의 경기라는 점에서 1-0 승부가 좀 더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밝힌바 있습니다.
쌍방울, 호랑이 무서운 줄 모른다
유희관처럼, 윤병웅 위원장처럼 1-0 경기에 짜릿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질문자 분께는 죄송하지만 저도 1-0 경기를 좋아합니다. 제가 본 최고의 1-0 경기는 1991년 8월 15일 해태와 쌍방울의 광주경기였습니다. 1위 해태와 7위 신생팀 쌍방울의 맞대결. 이날 경기는 더블헤더로 펼쳐졌습니다. 당시 쌍방울 어린이 회원이었던 저는 야구를 좋아하는 아버지 덕택에 전주에서 광주까지 원정 응원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운 좋게도 더블헤더 경기를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1차전은 1-1 무승부. 2차전은 ‘어린 왕자’ 김원형과 ‘무등산 폭격기’ 선동렬의 선발 맞대결이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께 볼 것도 없이 졌다며 집에 돌아가자고 떼를 쓴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기록을 찾아보니 김원형은 고졸 신인으로 신생팀 쌍방울 마운드를 외롭게 이끌었지만, 당시 경기가 있을 즈음에는 9연패를 기록 중이었습니다. 반면 선동렬은 1991년에도 최고였습니다. 19승 4패 1.55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전성기 중 한해였습니다.
그런데, 회를 거듭할수록 심상치 않은 기운이 돌았습니다. 그날따라 김원형의 폭포수 커브에 해태 타자들은 연신 헛 방망이를 돌려 댔습니다. 그러던 4회 일이 터졌습니다. 쌍방울 4번 김기태가 친 타구가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광주구장 담장을 그대로 넘어가버린 것입니다. 경기는 홈런 한방이 결정지었습니다. 1-0.
이날 경기에서 선동렬도 김원형도 최고의 투구를 보여줬습니다. 1시간 48분 만에 끝난 두 투수의 완투 대결은 2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날 동아일보에는 ‘쌍방울, 호랑이 무서운 줄 모른다’는 기사 제목이 실리기도 했습니다.
사실 재미의 척도를 계량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마다 재미를 느끼는 정도가 다를뿐더러 경기를 볼 때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타자든 투수든 한 쪽을 압도하는 실력을 보여주며, 점수가 차이가 크게 나지 않은 팽팽한 접전이 이어지는 경기를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에서, 또 경험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야구에서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일단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겨야 합니다. 응원하는 팀이 진다면 아무리 멋진 경기가 펼쳐진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오히려 ‘재미’가 ‘악몽’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점수가 몇 점이 나는지 보다는 그저 야구장에 가서 닭다리 하나 들고,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며 보는 야구가 세상에서 가장 재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