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가 성도를 포위했을 때, 허정은 촉군태수로 있었다. 익주의 수도였던 성도가 촉군의 한 현이었으므로 허정의 위치는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를 합친 정도의 요직이었다. 허정은 나이가 이미 일흔이었지만 죽는 것이 두려웠나 보다. 하긴 어떻게 살아왔던 인생이던가. 구차한 목숨 하나 지키려고 5000리 바닷길을 헤치고 이역만리를 떠돌아 다니다 간신히 얻은 안온한 삶이 아니었던가. 성의 함락이 임박했음을 누구나 감지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수도방위의 책임을 지고 있던 허정은 몰래 성을 빠져나와 유비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유장의 부하들에게 들키는 바람에 실패했다.
유장은 이미 유비에게 항복할 마음을 굳힌 상태였기 때문에 허정의 배반행위를 문제 삼지 않았다. 유비는 익주를 장악한 후 널리 명사들을 초빙하고 인재들을 발굴해 적재적소에 기용했다. 허정은 익주의 선비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사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중용할 것을 추천했다. 제갈량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유비는 허정이 비겁하게도 성도의 함락이 임박하자 항복하려 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내심 그를 경멸했다. 유비가 허정을 박대하고 등용하지 않자 법정이 유비를 설득했다.
"세상에는 헛되이 명성이 높으나 실질이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허정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공께서는 이제 막 대업을 창업하셨으므로 천하 사람들의 중론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허정의 헛된 명성이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있으므로 만약에 그를 예우하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주공께서 어진 사람을 천시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현혹시키려면 오히려 그를 더욱 존경하고 귀하게 대우하는 척 해야 합니다."
유비는 법정의 말에 따라 허정을 자신의 비서실장 격인 좌장군장사로 삼았다. 유비가 허정을 영입하자 그때까지 유비에 대해 의심스런 눈길로 바라보던 익주의 이름난 선비들이 자연스럽게 유비의 진영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허정과 같이 명성은 높으나 실제로는 별반 쓸모없는 사람들도 소용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소위 정권의 정통성을 보강해 주는 역할이다.
허정은 이런 까닭에 유비정권에서 매우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허정은 태부가 되어 국가의 원로대접을 받았으며, 제위에 오른 후에는 사도가 되어 삼공의 반열에 올랐다.
인천차이나타운 `삼국지` 벽화거리. 허정은 무력이 지배하는 난세에 떠돌이 삶을 산 지식인이었다. IS포토
[영웅의 이면] 허정, 난세 최고의 36계 달인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학문하던 선비들은 제 한 몸 지키기도 어려워졌다. 많은 사대부들이 가족 또는 친구들과 함께 보다 안전한 곳으로 피난했다. 어떤 사람은 난을 피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온갖 고난을 겪으며 유랑생활을 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허정(?~A.D 222년)이다.
젊은 시절 허정은 사촌동생 허소와 함께 ‘여남월단평’을 발행했던 유명한 인물품평가였다. 허정은 출사가 비교적 늦었다. 하는 수 없이 방앗간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한 적도 있었다 한다. 그는 동탁이 집권한 후 상서랑이 되어 인사를 담당했다. 당시 그의 상관은 이부상서 주비였다. 주비가 오경 등과 의논해 한복·유대·장자·공주·장막 등을 지방관으로 내보내 동탁에 대한 반기를 들게 했을 때 그 실무를 담당한 자가 바로 허정이었다. 동탁이 주비를 죽여버리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허정은 관동으로 도망쳤다.
이때부터 그의 기나긴 유랑생활이 시작됐다. 허정은 처음 예주로 가 예주자사 공주에게 의탁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공주가 패망했다. 허정은 다시 양주로 달아나 양주자사 진의에게 의지했다. 또다시 진의가 죽자 오군도위 허공의 보호를 받았다. 손책이 강동을 침공해 허공을 죽이자 허정은 회계태수 왕랑에게 달아났다. 허정은 왕랑과 친분이 있었으므로 그의 보호를 받았다. 이때 허정은 친족들은 물론 동향 출신들을 거두어들여 생계를 보살펴주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왕랑이 손책에게 패해 바다로 도망치자 허정도 그를 따르는 백여 명의 무리들과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망망대해로 나갔다. 이때 겪은 고생은 그가 조조에게 보낸 편지에 생생히 묘사돼 있다.
"도중에 민·월을 지나며 만 리 길을 갔는데 한나라 땅은 보이지 않고 풍파에 표류했습니다. 식량이 떨어져 풀을 먹었으며 굶어죽은 자가 태반이었습니다. ~ 남해에서 형주로 북상하고자 하였으나 창오군의 여러 이족과 월족이 봉기해 노약자들이 몰살을 당했습니다. 저 허정은 바닷가를 따라 오천 리를 더 달아났는데 도중에 전염병이 돌아 큰어머니께서 운명하셨고 함께 따르던 사람들과 처자식들이 거의 다 죽었습니다. 다시 서로 돕고 의지하며 교지군에 도착했는데 그 동안 살해당하거나 병으로 죽은 자가 많아 남은 사람은 열에 한둘뿐이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생과 고통은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인근 주로 이주해 비교적 쉽게 자리를 잡았던 다른 사람들에 비해 허정은 지독하게도 운이 없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이처럼 모진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으리라.
허정은 *교지군에 이르러서야 태수 사섭의 따듯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허정은 익주를 거쳐 천자가 있는 조정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어렵게 알아본 결과 허정은 유장의 초청을 받아 익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유장은 그를 파군태수, 광한태수를 거쳐 촉군태수에 임명했다.
유비가 촉에 입성한 후 그를 중용했다. 허정의 마음은 조정에 있었기에 유비에게 진심으로 충성하지는 않았다. 오로지 익주의 사대부들 사이에서 높은 존경을 받던 그의 명망을 이용하려던 유비의 의도에 맞게 조심스럽게 처신할 수밖에 없었다. 허정은 나이가 칠십이 넘었지만 후배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함께 청담을 논하기를 즐겨했다. 제갈량을 포함한 익주의 사대부들이 모두 그를 존경했다.
[거짓말 벗겨보기] 유장이 허정의 항복 때문에 혼절했다고?
'삼국지연의'에는 허정이 유비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장이 혼절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딱 한 줄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을 뿐인데 허정의 시도가 실패했으니 사실과도 맞지 않는다. 이외에도 유장이 유비에게 항복하는 대목에서 엉터리 같은 기사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동화가 유장에게 항복을 만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실은 이때 동화는 성도에 없었다. 또 초주가 동화의 말을 하늘의 뜻을 들어가며 반박하는데 초주는 훨씬 후대의 사람으로 유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