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녕은 난세를 피해 숨어산 은자이다. 삼국지 시대는 한·위, 위·진 두 번의 왕조교체기를 포함한다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왕조가 두 번씩이나 교체된 혼란기였다. 난세를 맞아 학문하는 자의 양심이 어떠하여야 하는지 알려주는 모범적 사례가 바로 관녕이다.
관녕은 학문을 한 전형적인 사대부였다. 사대부는 관리로서 출사해야만 그 존재가치가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삼국지 시대는 사대부가 봉사해야 할 대상인 국가 자체가 사라진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대부들은 각자 자신의 생각과 양심에 따라 다양한 행태를 보이게 된다. 어떤 이들은 재빨리 국가를 대신해 군벌들에게 출사했고, 어떤 이들은 난을 피해 이주하거나 유랑했다. 한편 관녕처럼 혼탁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은거한 은자들도 있었다. 새롭게 등장한 실력자들인 군벌들은 알고 보면 세상의 혼란을 틈타 권력을 도적질하려는 강도단의 두목에 지나지 않았다. 조정에 나아가 봐야 조조의 찬역에 협조하게 될 뿐이었다. 유학의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일수록 또 행동과 양심이 일치하는 사람일수록 은자의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젊은 시절 관녕은 왕렬·병원·화흠 등과 함께 청주의 이름난 명사였다. 천하에 대란이 일어났을 때 청주 지방은 혼란이 극심했다. 때마침 공손도가 바다 건너편 요동지방을 평정해 안정을 되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므로 청주의 많은 사대부들이 요동으로 피난했다. 관녕도 병원과 함께 요동으로 갔는데 공손도를 만나보고는 그가 흑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양평성 밖 북쪽 골짜기로 가서 초막을 짓고 살았다. 관녕은 제자들에게 ‘시경’, ‘서경’등을 강의하고 살았다.
위나라가 세워지고 조비가 제위에 오른 후 관녕은 37년 만에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동문수학한 사도 화흠의 천거에 따라 조비가 초청했기 때문이었지만 위나라 조정에 출사하지는 않았다. 위나라는 관녕의 높은 명망을 이용하고자 했으므로 조비는 물론 그의 뒤를 이은 조예·조방도 계속해서 그를 조정에 불렀다. 관녕은 번번이 늙고 병들었음을 이유로 취임을 고사했고, 그때마다 관직도 높아졌다. 나중에 일국의 총리급인 태위에 임명되었으나 관녕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관녕의 이러한 태도에 의심을 품은 조예는 청주자사 정희에게 명령해 관녕의 동태를 조사 보고하라고 했다. 그런데 이때 정희의 보고내용이 재미있다.
“관녕은 아직은 혼자 거동할 정도로 건강합니다. 신이 볼 때, 관녕이 계속해서 사양하는 이유는 홀로 오래 숨어 살았고, 나이가 들고 지력이 쇠해 스스로 벼슬을 감당할 수 없어 그러는 것입니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실제로 관녕도 자신이 중책을 감당할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끝까지 숨어 살다가 84세의 나이에 죽었다. 관녕의 처신을 보면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다시금 돌이켜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출세를 위해 줄을 대고 *곡학아세하는 학자나 지식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 양심을 저버리고 권력과 지위만을 좇다가 패가망신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가. 스스로의 한계를 정확히 알고 지조와 양심을 지키는 것이야 말로 학문하는 자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닌가.
중국 호북성의 한 농촌 풍경. 삼국지 시대 지식인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은자 생활을 했다.
[영웅의 이면] 관녕이 용 꼬리, 화흠은 용 머리?
젊은 시절 관녕(A.D 158~241년)은 화흠 및 병원과 함께 명망이 높은 대학자인 진식에게 수학했다. 세 사람은 사이가 좋아 항상 붙어 다녔으므로 그 당시 사람들이 이 셋을 일컬어 ‘한 마리 용’이라 불렀다. 화흠이 용머리고, 병원은 용의 배, 관녕은 용의 꼬리라 불렀다. 화흠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판을 얻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 꾸미길 잘하는 화흠에게 당시 사람들이 현혹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화흠은 관녕·병원에게 있었던 소위 진정성이 없었다. ‘세설신어’ 등 동 시대 사람들이 기록한 일화를 살펴보아도 화흠은 겉 다르고 속 다른 가식적인 면이 있었다.
화흠이 병원·관녕과 함께 공부하던 시절의 일이었다. 한번은 셋이 채마밭에서 호미질을 하고 있었는데 돌멩이 중에서 금덩이 하나가 나왔다. 비록 흙투성이였지만 노다지였다. 관녕은 그것이 돌덩인지 금덩인지 모르고 그냥 지나갔다. 병원은 돌멩이를 고르다가 금덩이를 발견했지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화흠은 이 금덩이를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는 멀리 던져버렸다고 한다. 세 사람의 물욕을 풍자한 이야기이리라.
또 한 번은 관녕과 화흠이 둘이서만 집안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밖에서 풍악이 울렸다. 효렴으로 천거돼 명예로운 관직을 하사받고 금의환향하는 관리의 행차였다. 관녕은 음악 소리를 듣지 못하고 공부를 계속했지만, 화흠은 책을 던져 버리고 길에 나가 한참 동안 행렬을 구경하다가 돌아왔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관녕은 이후로 화흠과 함께 자리를 하지 않고 멀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두 가지 일화를 보면 화흠이 비록 겉으로는 그 당시 도덕과 품평기준에 따라 관인군자의 행세를 열심히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출세와 영달을 꿈꾸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태와 남의 모범이 되는 몸가짐은 명성을 얻고 출세를 하기위한 하나의 포장이었을 뿐이다. 이에 반하여 관녕은 오로지 자신을 수양하고 학문을 닦는 일에만 힘썼다. 그의 생애가 이를 증명한다.
당시에는 관녕 이외에도 혼탁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숨어 산 은자들이 꽤 있었다. 관녕과 함께 요동으로 망명했던 왕렬이나 형주에서 후학들을 가르친 수경선생 사마휘, 제갈량의 장인 황승언, 방통의 집안 어른인 방덕공 등이 다 그런 사람이었다. 왕렬은 심지어 공손도의 초빙을 피하기 위해 시장에서 장사를 해서 먹고 살면서 스스로를 더럽혔다고 한다.
[거짓말 벗겨보기] 수경선생 사마휘, 제갈량을 유비에게 소개하지 않았다면?
‘삼국지연의’는 주로 어린애들이나 좋아할 싸움질 이야기나 남을 속여먹는 술책 중심이므로 당연히 절개와 지조를 지켜 숨어산 은자들의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관녕은 화흠이 복황후를 끌어내는 장면에서 그와 화흠을 비교한 ‘세설신어’의 기사가 잠깐 인용될 뿐이다. ‘삼국지연의’에 비교적 멋있게 등장하는 은자는 수경선생 사마휘 뿐이다. 그것도 그가 제갈량을 유비에게 소개하지 않았더라면 다뤄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과연 권력투쟁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치고받고 하는 일에 기여한 사람만이 역사의 주역이라 할 수 있을까.
풀이
*곡학아세(曲學阿世)=자기가 배운 것을 올바르게 펴지 못하고 그것을 굽혀가면서 세속에 아부해 출세하려는 태도나 행동을 가리키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