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유는 26일(한국시간) 그리스 페이라이오스의 카라이스카키 스타디움에서 올림피아코스(그리스)와의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에서 0-2로 완패했다.
잉글랜드 팀들이 유독 어려워하는 올림피아코스 원정(그러나 맨유는 앞선 원정에서 2전 전승을 기록 중이었다)이라 결과만 놓고 보면 최악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기 내용은 최악이었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은 경기를 챔피언스리그에서 보기는 힘들다. 맨유의 무기력증은 놀라울 정도였다.
현명한 올림피아코스
올림피아코스는 4-2-3-1과 4-1-4-1의 장점을 적당히 섞은 유연한 전형을 들고 나왔다. 델빈 은딩가가 수비형 미드필더를 맡고, 알레한드로 도밍게스가 공격형 미드필더를 맡았다. 그 사이에서 지안니스 마니아티스가 공수를 오가는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 활동했다.
맨유가 공격을 하면, 도밍게스와 마니아티스가 함께 압박하고 은딩가는 미드필드와 수비 사이의 공간을 커버했다. 맨유 공격이 더 진행되면 마니아티스가 뒤로 후퇴해 은딩가와 함께 수비라인 앞을 지켰다.
반면 맨유는 거의 단순한 4-4-2였다. 현지 중계는 웨인 루니가 아래로 내려가는 4-2-3-1을 예상했으나, 루니는 로빈 반 페르시와 함께 투 스트라이커로 활동했다. 아래로 거의 내려오지 않고 올림피아코스 센터백 코스타스 마놀라스 근처에서 공을 기다렸다. 고리타분해 보일 정도로 정적인 축구였다.
전반 38분에 나온 올림피아코스의 선제골은 행운이 섞인 골이었다. 하지만 경기력이 형편 없던 맨유가 억울해 보이진 않았다.
루니의 문제=맨유의 문제
이날 맨유의 문제점을 압축해 보여주는 선수가 루니였다. 루니는 과거 후방까지 열심히 내려가며 공격의 시발점 노릇을 하고 수비에도 적극 가담했다. 그러나 역동적인 모습은 세월이 갈수록 보기 힘들어졌고, 최근엔 전술적 움직임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루니는 이날 공을 받는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성실한 후배 대니 웰벡과 대조적이다. 웰벡은 어린 시절의 루니처럼 수비 가담이 좋고 활동 범위가 넓다. 알렉스 퍼거슨 전 감독은 지난 시즌 “상대로부터 공을 빼앗아오는 역할은 웰벡이 루니보다 낫다. 박지성이 보여준 것과 같은 역할”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공을 받으러 내려가지 않을 거라면 최소한 자신에게 오는 공은 동료에게 잘 전달해야 했는데, 루니는 올림피아코스 미드필더들의 빠른 견제를 이기지 못하고 백패스하거나 공을 빼앗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날 전진패스 25회 중 단 14회 성공에 그쳤다. 루니의 특기인 안토니오 발렌시아를 향한 롱패스는 4회 시도해 겨우 1회 성공했다.
맨유는 그동안 루니의 창의성에 심하다 싶을 정도로 크게 의존했다. 루니를 대체하기 위해 후안 마타를 영입했지만, 컵 타이 규정(올 시즌 첼시에서 챔피언스리그에 참가했기 때문에 시즌 도중 맨유로 이적한 후에는 챔피언스리그에 뛸 수 없다) 때문에 못 챔피언스리그는 출전 금지다.
루니 외의 다른 선수들도 무기력하긴 마찬가지였다. 발렌시아는 오른쪽 측면에만 붙어서 활동했고, 마이클 캐릭 역시 자기 자리만 지켰다. 성향상 톰 클레벌리가 전진하거나 애슐리 영이 안쪽으로 파고들며 공격의 연결고리 노릇을 해야 했으나 다들 자기 자리에만 머물러 있었다.
축구 해설가 게리 리네커는 SNS를 통해 “맨유 수비진도 문제지만, 미드필더들이 첫 번째 위험 지역을 비워놓고 있다. 한줄로 서있기만 한다. 예측 가능한 나쁜 플레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후반 9분 조엘 캠벨(올림피아코스)의 추가골이 터졌다. 오른쪽 날개 캠벨은 횡으로 드리블하며 페널티 지역 바로 밖 약간 왼쪽까지 이동했다. 캠벨이 과감하게 자기 자리를 떠나 골을 넣은 반면, 이때까지 맨유의 좌우 미드필더는 한 번도 위치를 바꾸지 않았다. 이 점이 두 팀의 차이였다.
교체도 올림피아코스가 앞서
결국 모예스 감독은 후반 15분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연결고리 노릇을 할 수 있는 가가와 신지, 열심히 뛰는 대니 웰벡을 넣으며 변화를 줬다. 이때 특이한 건 루니의 위치 변화였다. 모예스 감독은 루니를 투 스트라이커로 남겨놓는 것이 아니라 수비형 미드필더로 이동시켰다. 루니는 그만큼 공격에서 쓸모가 없었다.
모예스는 선수 교체를 하고도 정적인 4-4-2에 집착했다. 가가와가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 잠시 뛰는가 싶더니, 곧 왼쪽 윙으로 자리를 바꿨다. 웰벡이 루니 대신 판 페르시의 파트너를 맡았다. 수비할 땐 가가와가 왼쪽 측면에 딱 붙어 있었다. 큰 틀에선 전반과 다름없는 선수 배치엿다.
한편 올림피아코스가 교체 투입한 푸스테르와 마차도는 각각 오른쪽·왼쪽 미드필더로서 수비에 적극 가담했다. 마지막 교체로 투입된 넬손 발데스는 캐릭 근처에서 움직이며 빌드업까지 방해했다.
맨유 졸전의 원인
맨유는 첫 유효슈팅이 후반 44분에 나올 정도로 심각했다. 맨체스터 시티에 6골을 내주고 패할 때도 이 정도로 무기력하진 않았다. 맨유의 문제는 전술일수도, 체력일 수도 있다. 모예스 감독이 선수단 장악에 실패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특히 올 시즌 루니가 모든 요구사항을 관철시켜가며 '갑' 행세를 한 끝에 재계약했는데, 재계약을 하자마자 성의 없는 경기를 치렀다는 건 의미심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