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67)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은 스스로 ‘야구 바보’라고 한다. 야구가 인생 그 자체라고 여긴다. 그는 “인생에서 야구를 만났고 야구를 통해 인생을 배운다”고 말한다.
어려웠던 학창시절은 물론 미국 유학 생활,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와 총장, 국무총리 등 어디를 가든 무슨 일을 하든 야구와 더불어 지냈다. 정운찬의 '야생야사'는 지난 해 말 펴낸 책 ‘야구예찬’을 보면 알 수 있다.
올해도 늘 그랬듯 야구장을 찾거나, TV 생중계와 하이라이트 등을 통해 연간 100경기 안팎을 지켜볼 것이다. 누구보다 바쁘지만 삶의 고비마다 야구를 통해 자신을 ‘힐링’해 왔기에 가능한 일이다.
야구와 더불어 인생의 목표를 하나씩 일궈낸 그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로야구 개막을 앞두고 ‘야구 바보’에게 야구 이야기를 들었다. 꽉 짜인 스케줄로 피곤한 데다 감기 기운이 있었음에도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는 그의 모습은 천진난만 그 자체였다.
답답할 때, 외로울 때, 피곤할 때 ‘힐링’
-야구에 대한 사랑이 정말 대단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동네(서울 종로구 동숭동) 형들이 ‘야구할래?’라고 물어 따라갔다가 외야 플라이볼을 잡았습니다. 처음 하는데도 나름 잘 잡아 야구에 대한 소질이 있다고 여긴 것이 지금까지 야구와 함께 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경기중학교 감독님으로부터 ‘야구를 하는 것보다 공부하는 것이 낫겠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이후에도 야구 경기에서 펼쳐지는 순간들이 우리의 사는 모습과 너무 닮아 점점 더 빠졌습니다.”
-그 바쁜 와중에 야구에 시간을 내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옵니까.
“어린 시절에는 다른 놀 거리가 없어 야구가 좋았지만 철이 들면서 답답할 때, 외로울 때, 피곤할 때 재충전이 되니까 자꾸 야구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청년 시절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며 답답할 때 야구장에 가서 답을 얻었고, 시골(충남 공주)에서 올라와 자주 외로움을 느꼈는데 그때마다 허전함을 달래준 것이 야구입니다. 직장을 가진 다음에도 피곤할 때 야구장에 다녀오면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그러니 야구장에 못 가면 TV중계를 보고. 밤늦게 퇴근하면 TV 하이라이트라도 챙겨보게 됩니다.”
-신문에서 야구 경기기록지도 보십니까.
“아침 신문 기사를 보며 누가 더 잘 썼는지 비교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록지도 자주 봅니다. 그 외에도 타격, 방어율(평균자책점), 홈런 순위까지 다 챙겨봐야 분석의 맛이 나지요.”
야구를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추천
-한국야구 명예의 전당이 조만간 설립됩니다. 50년 이상 야구를 지켜봤는데 명예의 전당에 꼭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신 분은 누구입니까.
“우선 스포츠 명예의 전당이 있다면 야구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야구가 국민의 피로회복에 큰 공헌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경제개발 50년 동안 별 보고 출근하고 달 보고 퇴근했는데 야구가 피곤한 그들을 많이 위로했습니다. 1950~60년대 야구인으로는 박현식 김영조 김양중 장태영 백인천 등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70년대는 미국에서 공부하느라 잘 모르지만 80년대에는 박철순 최동원 선동열 등이 생각납니다. 수업을 빼먹고 야구장을 찾지는 않았지만 시험기간 중에도 짬을 내 야구장을 찾아간 적이 많았는데 그때 본 선수들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좋아하는 팀이 있습니까.
“오랜 인연을 맺은 두산입니다. 서울대 재학 시절 동창회 장학금을 받았는데 당시 상과대학 동창회장이 OB(현 두산)의 고 박두병 회장이었습니다. 이후 두산 베어스 ‘평생회원’이 되었습니다. 프로야구가 출범할 때 OB가 고향(충청도) 프랜차이즈 팀(한화가 창단하며 서울로 이전)이었던 것도 ‘절친’으로 지낸 배경입니다. 그리고 한 번 정들면 끝까지 가는 것이지 바꾸고 하면 됩니까.”
-이제 승패를 떠나 야구를 즐길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두산이 지면 속상하고, 두산이 이기면 신나죠. 경기에서 지면 집에 가서 오늘 왜 졌나를 복기하게 됩니다. 요즘 일부 채널에서 편파 중계를 하던데 종전보다 굉장히 재미 있습니다.”
동반성장은 프로야구에서도 필요
-일부에서는 ‘모기업에 의존하는 한국 프로야구는 진정한 프로가 아니다’고 혹평합니다. 이 시기에 한국 프로야구에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거의 모든 팀들이 재벌 이름을 앞세우고 하잖아요. 아직도 실업팀 같아요. 한 팀이 모기업의 지원을 받아 1년에 한 150억 원 정도 쓴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언제까지 그런 투자가 가능할까요? 하루빨리 수익개념을 확립해 자립을 해야 합니다. 독립하려는 개념이 잘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야구를 재미있게 하고, 관중을 즐겁게 해 돈을 벌려는 의식이 줄어들게 됩니다.”
-구단의 힘만으로 대처하기는 힘들지 않습니까.
“미국처럼 각 도시들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서울시는 프랜차이즈 구단인 LG나 두산에 구장 사용료를 저렴하게 하고 장기임대를 해줘 상생하는 구조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최근에 구장 광고권을 회수하는 등 반대로 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시민들이 야구를 즐기고 삶의 활력을 얻는다면 지방자치단체에서 적극 지원을 해야 합니다. 미국은 지자체에서 구장을 지은 뒤 프랜차이즈 구단에 장기임대를 해주고 1년에 1달러만 받는 곳이 있습니다. 구단은 이를 바탕으로 수익을 내기 위해 재미있는 경기, 즐거운 관람문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죠.”
-프로야구 선수들의 몸값도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최저연봉 2400만원 대 최고연봉 15억원은 설명할 방법이 마땅치 않습니다. 2014년 롯데가 FA(프리에이전트) 강민호에게 4년간 75억원을 주었고, 한화는 스토브리그에서 지급한 돈이 무려 201억원이나 되는 것을 보고 선수들의 몸값이 공정한지 고민했습니다. 선수들이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이전까지 스타에게 가급적 좋은 대우를 해주자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구단의 능력에 부치는 제도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단기적으로는 연봉이 너무 적어 생활하기도 빠듯한 선수들은 없도록 하되, 선수들이 마치 복권을 뽑기라도 하듯이 고액 연봉을 기대하지는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각 구단이 퓨처스리그 운영을 건실히 하고 좋은 선수를 많이 길러 고액 연봉 선수에게만 의존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관람 문화 혜택이 대도시에 편중되어 있습니다. 소외된 도시나 시골의 팬들도 야구를 즐길 수는 없을까요.
“새벽 2시에 야구하러 가는 것을 본 적 있나요? 중소도시에도 사회인 야구를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야구할 곳이 부족합니다. 한 모임에 나갔다가 밤 12시께 ‘집에 가야 된다’고 했더니 참석자 중 일부가 ‘조금 더 있다 가라’는 거에요. ‘새벽 2시에 야구하러 갈 때까지만 같이 있어 달라’고 말입니다. 처음에는 1만명 정도의 소규모 구장이라도 많이 지어 놓으면 프로 1군 팀이 경기를 할 수 있고, 소외된 지역의 팬들에게 보는 재미를 선사할 수 있습니다.”
-프로야구에서 동반성장의 의미를 찾을 수 있나요.
“우리나라는 아직 야구 저변이 좁아요. 2군을 제대로 운영하면 선수에 대한 대우가 좋아질 것이고, 그러면 2군에 들어가려고 하는 3군이 생길 것입니다. 그때는 2군 프랜차이즈제도 도입할 수 있습니다. 실현 가능하도록 야구 관계자들이 인식을 바꾸고,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야구팬 입장에서 동반성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신생팀 구단주라면 구단 사장, 단장, 감독, 코치, 선수 등으로 꼭 스카우트하고 싶은 인물이 있습니까.
“우선 구단의 사장 단장은 잘 모릅니다. 자주 보는 두산(사장 단장)은 팀워크를 잘 이끌어내는 것 같아 보입니다. 지도자로는 염경엽 넥센 감독이 좋아 보이던데요. 자율야구를 하는 것 같고 선수들과 잘 소통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선수로는 박병호(넥센)를 꼭 데려오고 싶습니다. 팀 구성을 해본다면 투수 장원삼(삼성), 포수 최재훈(두산), 내야수 박병호 정근우(한화) 최정(SK) 손시헌(NC), 외야수 이진영(LG) 이종욱(NC) 김현수(두산), 지명타자 이병규(LG·등번호 9) 등이 생각나네요. 나는 노력형 선수들이 좋습니다.”
동북아 리그 제안과 돔구장 반대
-한국 일본 대만 중국 등을 포함하는 동북아리그를 제안하셨습니다.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은 미국 메이저리그 우승팀과 진정한 월드시리즈를 치르기 위해 호주까지 포함하는 아시아리그 창설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야구가 우승한 의미를 글로 써달라는 신문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그렇게 제안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호주, 남미, 북미, 동북아리그 우승팀이 모여 월드시리즈를 하는 것입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이지만 한국 선수가 미국에 팔려가면 그쪽 메이저리그 경기를 보느라 국내 프로야구 관심이 떨어집니다. 그 사람들 보려고 야구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측면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마이너스입니다. 동북아리그를 만들어 아시아에서 시장을 넓히면 선수 유출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국가간 이동으로 인해 비용 부담을 감당할 수 있는 구단이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인기가 올랐고 팬들이 돈을 쓸 수 있는 여유가 늘었습니다. 관중 수입에만 매달리지 않고 스카이 박스를 만들어 고급 음식도 파는 등 마케팅 방법은 찾으면 있습니다.”
-야구가 올림픽에서 퇴출된 것은 저변이 세계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변 확대를 위해 베트남 태국 등 동남아시아 등에 한국이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여깁니까.
“동남아시아라도 야구 인기가 높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허구연씨 등 일부 야구인이 개인적으로 돕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방법이 있다면 한국야구가 전폭적으로 지원해야지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개최를 비롯해 야구계의 숙원인 돔구장 건설 해법은 없을까요. 동대문, 잠실, 분당, 안산 등이 건설 후보지로 거론됐지만 기본 방향인 민자유치를 못해 불발된 바 있습니다.
“인기 없는 발언일 지 모르지만 돔구장 건설에 반대합니다. 야구는 '들 야(野)'자 야구입니다. 야외에서 해야 야구의 참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일본 도쿄돔과 후쿠오카돔에 가봤지만 시끄러운 데다 공기도 좋지 않아 야구에 집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돔구장을 짓는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기존 야구장에서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시설을 개선하거나 신축하는 것이 더 시급합니다. 4년에 한 번씩 하는 WBC 개최를 위해 돔구장을 짓는 것은 경제적으로 낭비입니다.”
KBO 총재는 정치적 수완 있어야
-프로야구는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에 따라 상당한 영향을 받습니다. 나중에 총재 제의가 오면 받아들이실 용의가 있으십니까. 꼭 총재가 아니더라도 야구와 관련한 일에 공헌할 의향은 있으신지요.
“KBO 총재는 ‘야구를 좋아하고, 잘 알고, 정치적 수완이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제의를 받은 적이 있지만)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 야구는 좋아하지만 아직 발전이 필요한 한국 프로야구를 이끌 만큼 나는 정치적 수완이 없습니다. 총재는 지방자치단체나 중앙 정부를 잘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총리 재임시절 광주구장 신축에 힘을 보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09년 광주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을 아들과 같이 가서 봤는데 깜짝 놀랐어요. 어떻게 그런 야구장에서 팀이 10번이나 우승할 수 있었나 하구요. 그런 곳부터 개선을 해야지 돔구장이 우선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나서 총리 취임 후 광주광역시장이 찾아와 야구장 신축을 도와달라고 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500억 원 정도 지원을 해야 하는 것으로 들어 총리실에 강력히 말했습니다. 관중들이 야구장에 와서 즐거웠다면 그것만큼 시민 서비스에 대한 좋은 투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 야구장에 갔을 때 주로 앉는 위치는 어디십니까. 나름대로의 관람 비결은.
“1회초 1번타자부터 9회말 마지막 타자까지 봐야 직성이 풀려서 조용한 곳이 좋습니다. 연간회원권을 이용해 주로 백네트 뒤에 가서 봅니다. 일행이 있을 경우에는 1루쪽에 가서 관람합니다. 우리나라 구장은 응원이 너무 시끄러워요. 스트레스 푸는 것은 이해하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개선을 했으면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모두가 이승엽이 될 수는 없다
-학생야구가 학업과 야구를 병행할 수 있도록 주말리그제를 도입하고, 투구수 제한을 하는 등 나름대로 개선책을 내놓고 있습니다. 서울대 총장 시절 학교 야구부가 첫 승리를 거둬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학생야구에 대해 조언을 해 주신다면.
“우리보다 먼저 야구를 한 일본과 미국에서 배워야 합니다. 초중고교에서는 공부와 함께 체력을 기르고, 야구의 기본기를 터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부를 해서 진학하든 특기생으로 입학하든 그 기본기를 바탕으로 좋아하는 야구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너무 일방적입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만 하는 학생은 기본기가 안돼 대학 가서나 성인이 돼서도 야구를 제대로 할 수 없고, 야구만 하는 학생은 프로에 진출하지 못하면 사회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모두가 이승엽(삼성)처럼 프로에서 성공할 수는 없는 법인데도 말입니다. 주말리그제는 그런 면에서 굉장히 바람직합니다. 내가 총리 시절 강력히 주장해 실현하게 됐습니다.”
-프로에서 잘 해야 성공이라고 여기는 학부모들이 많습니다.
“미국 유학 시절 프린스턴대학의 아몬드 힐이라는 농구선수가 애틀랜타 호크스에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됐습니다. 그런데 학점이 모자라 졸업을 못하다 1년 뒤에 가는 것을 보고 운동과 공부를 병행시키는 미국 대학교육의 엄격함이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신문에서 본 것입니다만 일본 고시엔대회(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4강까지 오른 팀이 학교 시험을 보기 위해 기권을 했다고 합니다. 4500여 개교 중 예선을 거쳐 본 대회에 나간 것만 해도 대단한데 학교 시험 날짜와 대회 일정이 겹치자 학생들은 시험을 택한 것입니다. 전국대회 성적이 곧 진학으로 이어지는 우리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성 팬들은 경기 시간 단축을 원한다
-요즘 야구 관중 가운데 여성 비율이 늘어 저변 확대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여성 관중이 40~50%면 됐지 더 바랄 수 있나요. 그런데 여성 관중을 위해서라도 경기 시간을 단축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집사람하고 야구장을 자주 가는데 어느 순간 ‘시간이 너무 길다’며 같이 안 가겠다고 합니다. 미국은 3시간을 안 넘는 것으로 압니다. 여성 팬을 많이 유치하려면 게임 시간 단축이 필요해요.”
-야구장에서의 인연도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 현재도 좋은 인연을 이어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김민아 아나운서(MBC 스포츠플러스)도 인터뷰를 인연으로 해 8일 결혼 주례를 서기로 했습니다. 스코필즈 기념사업회, 동방성장포럼 등 내가 관여하고 있는 일에도 많은 야구 팬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