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이진영 대표는 "여성이 `리더`인 사회가 되려면 우선 사내 보육시설이 확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작은 사진은 이진영 대표(왼쪽)와 이창민 병원장. IS포토 사진설명>
바야흐로 여성 경영인 시대가 왔다.
여성 종합지원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전국에 여자가 대표인 사업체 수는 총 130만 6148개로 집계 됐다. 남성 중심의 거친 비즈니스 세계에서 특유의 부드러운 리더십을 앞세운 여성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 여성의 사회적 역할 역시 '일하는 여성'에서 '이끄는 여성'으로 한층 발전하고 있는 추세다. 단순한 경제 활동 참여를 넘어 한 기업을 이끌어 가고 있는 여성 리더들. 그들은 어떤 실패를 겪었으며 어떻게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을까. 잘 나가는 그녀들을 만나 속 깊은 이야기를 들어봤다.
"의사가 진료에만 신경 쓸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야 환자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됩니다."
8년째 병원 컨설팅 사업을 이어오며 험한 일을 도맡아 하는 이진영 대표는 사업 시작 전까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다.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첼로와 피아노를 연주하고 대원외고에서 서울대, 미국 유학으로 이어지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그야말로 '엄친딸'이었다.
"학창시절 저는 엄마에게 전부나 다름 없었어요. 엄마는 저와 제 동생, 두 딸을 키우며 한 평생을 사셨어요. 남들은 자고 있을 아침 시간에 저는 늘 학원에서 수업을 받은 후 등교 했어요. 엄마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저를 태권도 학원, 영어 회화 학원에 데려다 주셨지요."
이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이진영 대표에게 가장 힘들었던 경험은 콩쿨를 앞두고 피아노를 연습했던 기억이었다. 평소 하루에 2시간씩 연습하던 피아노를 그때는 하루 7시간씩 연습해야 했던 것. 밖에서 잠긴 문은 7시간을 꼬박 채우고 나서야 열렸다. 이 대표는 그때의 경험으로 '하기 싫은 것을 끝까지 하게 하는 끈기'를 배운 것 같다며 웃었다.
언어학을 전공하고 대학교 졸업 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그녀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은 남편을 만나면서부터다. 남편인 이창민 대구수성중동병원 병원장은 지금의 이 대표를 있게 한 장본인이다.
"남편을 만나 같이 병원을 개원했는데, 외래환자를 오전 7시부터 저녁 9시까지 봐야 하니까 의사인 남편은 진료 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입원실이 있는 병원이라 야간엔 입원 환자도 받아야 했어요. 남편이 진료에만 신경쓸 수 있도록 나머지는 제가 다 해야 겠다고 생각했지요. 둘이서 하던 일을 체계화 시킨 거예요."
'병원 컨설팅'은 말 그대로 의료진이 진료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진료 외 나머지 부분을 총괄하는 일이다. 건물 공사부터 식자재 납품에 이르기까지 원무·행정·청구 업무를 포함한다. 이런 일들은 의사들이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맡아서 해줄 인력이 필요한 것. 이 대표는 간병사나 정신과 병원 치료 보호사들을 교육시켜 단체로 파견 보내기도 하고 병원 내 직영 편의점에 환자들에게 필요한 맞춤용 생필품을 구비해두기도 한다.
"제가 원래 아무리 아파도 병원은 절대 안가는 사람이었거든요. 주위에서도 의사랑 결혼했다고 하면 웃을 정도로요. 정신과 병원을 맡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런데 그런 점들이 오히려 도움이 되더라고요. 아는 게 없으니까 하나하나 다 찾아보고 가서 물어보고 몸으로 부딪히게 되는 거예요. 하던 일이 아니니까 오히려 재밌고 신기했어요."
진료 외 일을 도맡아 하며 그녀는 더이상 '곱게 자란 엄친딸'일 수 없었다. 사건 사고는 끊이지 않고 터졌다. 이 대표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고가 일어났다고까지 표현했다. 병원 식당 주방에 배수구가 막히면서 물이 넘쳐 올라오는가 하면, 한 겨울에 히터가 고장나고, 어느 날은 식당 요리사가 갑자기 안 나오기도 했다. 그 때마다 이 대표는 고무장갑을 끼고 배수구를 뚫고 전기 장판을 갖다 나르고 병원 식당에서 몇백인분의 음식을 만들어 내놨다.
"병원을 개원하고 명절 연휴에 시댁이나 친정에 가본 적이 한번도 없어요. 300인분의 전을 한번에 부치는 데는 도가 트였지요. 명절에는 직원들은 쉬어야 하는데 보호자들은 날을 잡고 찾아오기 때문에 오히려 병원에는 사람들이 북적여요. 식당에서 내놓을 명절 음식을 만드는 일부터 보호자를 모시는 일까지 모두 책임지고 해야 했어요."
이 대표가 회사를 운영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돈을 벌기보다 병원이 잘되게 하자'는 것이다. 남편 병원에서부터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이런 가치관을 갖게 됐다고 했다. 이렇게 시작한 프로젝트 중 하나가 지적 장애인을 채용해 훈련 후 파견하는 일이다. 대구 수성구 장애인교용공단과 협약하고 장애인사회복지관, 장애인학교와도 연계해서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 있는 것. 이렇게 훈련을 받은 이들은 요양 보호사 도우미로 일하게 된다.
"정신과 병원을 하다보니, 병원에 있는 환자들과 보호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어요. '이 병원에서 치료를 잘 받으면 취직도 할 수 있구나' 하는 희망이요. 처음 장애인들을 훈련시킬 때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지만 시간이 지나보니 어느새 이런 점들이 우리 회사의 가장 큰 경쟁력이 됐어요. 수입보다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가짐 말이예요."
사업을 시작하고 지난 8년 동안 이 대표는 본인이 참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1000명 정도의 인원이 먹고, 자고, 살아가는 병원에서 모든 잡무를 책임지면서 스스로도 철이 많이 들었다는 것.
"힘들고 어려운 것을 잘 모르고 컸어요. 일을 시작하고 정신과 환자들을 진심으로 대하면서, 장애인을 채용하고 훈련시키면서 스스로도 바람직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서 기뻐요. 10년 전의 저보다 지금의 제 모습이 저는 훨씬 좋아요."
이 대표는 본인과 남편의 관계를 '영혼의 톱니바퀴'라고 표현했다. 서로를 자랑스러워하고 고마워하는 그 마음이 너무 좋단다. 훌륭한 의사인 남편과 남편이 진료에만 집중하게 도와주는 아내, 두 사람은 정말 꼭 맞는 '톱니바퀴'였다.
한 회사의 대표로, 이 시대의 커리어우먼으로 우뚝 서 있는 그녀도 집에서는 친구 같은 엄마다. 모든 일을 초등학교 2학년인 딸과 의논한다. 어린 딸이 의논 상대가 되어주지는 못하지만 이를 통해 모녀가 한층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이 이 대표의 설명이다. 더불어, 딸 아이에게 공부를 강요하거나 목표를 주입시키는 엄마는 되고 싶지 않단다.
"아이에게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제 목표는 제가 이루고, 아이는 또 아이의 목표가 생기겠지요. 아이는 아이의 꿈을 꾸고 엄마는 엄마의 꿈을 꾸는 관계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요."
엄마가 일하는 현장을 보며 자란 아이가 엄마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이 대표는 딸을 곧잘 병원에 데려간다. 바쁜 엄마에게 보채지 않고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다른 의사 선생님과 곧잘 이야기를 나누는 딸 아이가 아주 사랑스럽단다.
깍쟁이 엄친딸에서 소탈한 여장부가 된 그녀는 사업은 여자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여자가 남자보다 사업을 잘 할 수 있는 건 아이를 낳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힘든 일을 하더라도 밤에 아이가 자는 모습을 보면 정말 100% 치유가 되거든요. 여자들은 출산을 함으로써 평형 감각을 가질 수 있게 되는데, 그래서 극단으로 가지 않고 실수도 줄일 수 있어요. 여성이 '리더'인 사회가 되려면 사내 보육시설 확충이 우선이예요. 엄마가 일하는 것을 아이가 직접 보면서 자란다면 분명 대한민국의 미래는 분명 달라질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