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정도전'은 작가의 열정과 노력이 만들어낸 지독한 결과물이다. 정현민 작가는 정도전의 인생을 그려내기 위해 150권 이상의 책과 200여 편의 논문을 읽었다. 1년 동안 6시간 이상의 숙면을 한 적도 없다. 아침 6시면 자동적으로 눈이 떠졌다. 지난 3월부터는 머리에서 정전기가 나는 느낌까지 들었다. 이른바 '긴장성 두통'이었다. 두 명의 보조작가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영등포 평생학습관과 국회도서관을 수도없이 오가며 조력자 역할을 해냈다.
노동운동가를 거쳐 10년간의 국회의원 보좌관 생활을 마무리한 그는 2009년 KBS 극본 공모에 당선되며 40세 늦깎이로 작가의 길을 걸었다. 안정된 생활을 버린 후 부인에게는 "2년 만 허리띠를 졸라매자"며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용기와 도전으로 시작했던 '정도전'은 잊을 수 없는 명품 드라마가 됐다. 녹록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탄생시킨 '정도전'은 굴곡진 그의 인생을 그대로 투영했다. 지난달 30일 당산역 인근 커피숍에서 만난 정현민 작가는 한결 여유가 느껴졌다. 그에게서 '정도전'의 모든 것을 들어봤다.
-아쉽게도 시청률이 20%(최고 19.8%·평균 15.5%)를 넘지 못했다.
"지금의 시청률도 정말 감사드린다. 여름은 시청률에서 비수기다. 똑같은 프로그램을 하더라도 시청률이 여름보다 겨울에 3~4% 더 높게 나온다. 하늘이 도운 결과 같다. '정도전'은 간단히 말해 쉬운 드라마가 아니다. 오피니언 리더나 이런 분들은 조금 보겠다 싶었는데, 이 정도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다. 앞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데 정말 많은 힘이 될 거 같다."
-쉬운 드라마가 아니라는 건 어떤 의미인가.
"(극본 공모에) 당선이 되고 난 다음에 KBS에서 1년간 인턴십을 했는데, 어떤 감독이 "드라마 대본은 한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다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더라. 그 원칙에 따르면 이 드라마는 꽝이다. 기존의 일반적인 대박 공식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정도전'을 하면 안됐다. 일생에 논쟁이 있는 분이 아닌가. 정도전은 그래서 리스크(위험)가 있는 인물이었다. 강병택 감독도 꽤 오랜 시간 이 작품을 준비했는데, 주변에서는 안 된다고 했다더라. 어렵고 풀어내기 쉽지 않은 사람이 정도전이었다. 최대한 쉽게 쓰려고 했지만…그런 핸디캡이 있는 기획이었다. 20%에 가까웠던 시청률이 대단한 결과라고 느껴지는 이유다."
-시청자들의 외면이 두렵지 않았나.
"방송이 망하지 않을 정도의 시청률은 나와야 하지만 무엇보다 공익성에 충실하고 싶었다. 방송 후에 '정도전'과 관련된 인기 검색어가 포털에 오르면 작가로서 보람이 느껴졌다. 그리고 더 많은 전율과 책임감도 느꼈다. 국민의 수신료로 장난을 치고 싶지 않았다. 결과를 보니 시청자들이 역사에 충실한 드라마에 목말라 있었구나 싶었다. 날 믿어줬던 강병택 감독에게 너무 고맙다."
-정도전을 이야기할 때 이인임(박영규)을 빼놓을 수 없을 거 같다.
"드라마의 1등 공신이다.(웃음) 사료를 공부하다보니 매력적인 부분이 많이 나오더라. 처음부터 이인임에 딱 꽂혔다. 극 초반에 이 사람으로 악역을 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 9단이고, 혼란스러웠던 14년 동안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른 사람이다. 여기에 최영(서인석)까지 포섭해 연정까지 했다. '이 사람은 진짜 고수다' 싶더라. 절대 화내지 않고, 존댓말을 쓴다 등 이런 몇가지 특징이 떠올랐다. 쥐어짜는 대사가 없었다. 이인임을 쓸 때가 가장 쉬웠다."
-가장 애착이 갔던 캐릭터인가.
"정도전을 제외한다면 그렇다. 이성계(유동근)는 가장 드라마적인 캐릭터로 뽑아냈고, 이인임은 가장 정치사극적인 캐릭터였다. 이 사극(정도전)이 정치사극이라는 걸 알려야 했고, 이런 이유로 초반에 가장 애착이 갔던 캐릭터였다."
-이인임의 역할이 정말 크긴 했다.
"기존의 악역과 조금 달랐다. 드라마를 통해 정도전은 '세상은 바뀐다'는 걸 보여주지만 현실의 벽이 바로 이인임이다. 시청자들이 공감을 느낀 건 이인임이 표피적인 악역이 아니라 왠지 자기 생활에서 겪어 봤음직한 그런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보좌관 생활을 했던 게 많은 도움이 됐나.
"두 가지의 경험이 중요했다. 노동운동가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고, 난 그냥 데모판에 있던 활동가였다. 그리고 10년간의 보좌관 생활. 안과 밖에서 느꼈던 그 두 가지의 다른 경험이다. (데모를 하면서) 길거리에 드러누울 때는 가끔 막막할 때가 있다. 이인임의 '힘을 길러라'는 말은 막막하다. 그런 개인적인 경험과…현장에선 세상을 바꾸려는 순수한 정서가 아직 있다. 주변에서 (드라마가) 리얼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경험하지 않은 것을 하면 티가 난다. 정도전을 그리는데 과거에 데모를 했던 경험이 도움이 됐다. (드라마) 제안을 받았을 때 과거에 노동운동가라는 사람들을 많이 찾아봤는데, 그 사람들은 감성적이다. '정도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지금은 무당파라고 하던데 맞나.
"지난 대선에서도 투표 당일 날에야 (누구를 찍을지) 결정을 했다.(웃음) 어느 순간 중도도 의미가 있구나 싶더라. 당분간은 이 기조를 유지할 생각이다."
-'정도전'은 배우들의 연기가 연일 화제였다.
"이전에도 대하 사극을 하셨던 분들이다. 작가 입장에서 대본을 썼는데, 배우들이 그 맛을 훨씬 잘 살리는 때가 있다. 그건 연기에 힘이 있다는 거다. 그런 힘을 한 번 보여주면 글을 쓰기 쉬워진다. 배우들의 연기를 믿으니까 대본도 잘 나온다. '정도전'이 딱 그랬다. 정치사극은 논쟁 부분이 있어서 배우들의 연기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TV토론을 보는 것 같은 지루함이 있다. 하지만 배우들이 너무 맛깔스럽게 잘 살려줬다. 연기가 대본을 살렸다."
-드라마 속에서 정도전의 비중이 너무 작다는 지적도 있었는데.
"이 드라마가 가장 비판을 받았던 부분이다. 그건 전적으로 작가의 책임이다. 초반에는 정도전의 비중이 작지 않지만 이 캐릭터가 성장형으로 가다보니까 보시는 입장에서는 조금 답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뒤로 가면 갈수록 빛이 나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이인임이나 최영은 등장부터가 절정의 캐릭터였다. 정도전이 밀리는 게 당연했다. 그렇지 않다면 픽션 사극이었다. 변명을 하자면 정도전이 가지고 있는 성리학이라는 큰 틀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재현이 형의 연기가 정말 좋았다. 담백하게 너무 잘해주셨다."
-유동근의 사투리 연기도 압권이었다.
"드라마를 쓰기 전에 각각의 캐릭터마다 특징을 잡았다. 정도전은 고려가 버린 아웃사이더, 이인임은 현대 정치인을 많이 닮은 '정치 9단', 정몽주는 고려의 우수한 유전자를 모두 물려받은 엄친아였다. 하지만 이성계는 정체성을 끊임없이 경계하는…말 그대로 경계인이었다. 원나라에서 태어났지만 고려의 후손이고 변방에서 여진족과 생활한 사람이 이성계 아닌가. 사람들은 그를 촌뜨기라고 한다. 주위 사람들과 잘 섞이지 않는 장치로 사투리를 넣었다. 또 내가 사투리를 좋아한다.(웃음)"
-너무 모범생인 정몽주(임호)가 답답하진 않았나.
"정몽주가 너무 정형화돼 있는 거 아니냐는 비판을 초반에 많이 받았다. 하지만 드라마 작법상 정몽주는 25회까지 계속 버닝(갈등을 고조시키는)을 하는 역할이었다. 힘을 많이 줄 수 없었다. 또 (정몽주의) 원칙적인 캐릭터가 (드라마의)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했다. 정도전과 대비되는 사람을 그리고 싶었다."
-드라마의 유일한 허구 중 하나가 양지(강예솔)라는 캐릭터인데.
"'정도전'은 혁명을 하는 이야기다. 주인공이 혁명을 결심하는 부분에서 시청자들의 공감을 살 수 있어야 했다. 드라마의 관건 중 하나였다. 산문집에 남아있는 정도전의 귀향기는 굉장히 전원적이다. 드라마적인 에피소드가 없다. 초반에 강병택 감독과 난관에 부딪혔을 때도 10년간의 귀향을 어떻게 그리느냐가 문제였다. 혁명을 결심하게 되는 부분에서 '백성'을 상징하는 캐릭터를 만들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양지는 이런 의미에서 '여자'가 아니라 '백성'이었다. 자기가 지켜야 하는 백성. 그런 양지마저 비참하게 죽으니까 정도전이 괴물이 되겠다고 한 것이다. 애초부터 이 부분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드라마를 편하게 볼 수 있는 장치였다. 그리고 (양지가 등장한) 거평부곡 에피소드가 너무 만족스러웠다. 다시 또 '정도전'을 해도 양지는 넣을 것이다. 가장 아끼는 캐릭터가 바로 양지다. 양지가 죽기 2주 전부터 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더라."
-'세상이 바뀐다'는 정도전의 말은 그가 죽었기 때문에 결국 실패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은 조선이 건국됐다. 완성을 못보고 죽었지만 틀을 마련한 게 정도전이다. 이방원도 사병혁파를 비롯한 많은 부분에서 정도전의 것을 차용했다. 미완의 혁명일 수 있지만 실패한 혁명은 아니라고 본다."
- '정도전'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은 뭐였나.
"원래는 '꿈'이었다. 그래서 엔딩에도 '세상은 바뀐다'는 꿈에 대해 이야기를 넣었다. 지금은 꿈이 작아지고, 꿈마저도 사치가 된 느낌이다. 시청자들에게는 지금의 일상이 전부가 아니다. 지금보다 나은 게 가능하다는 그런 꿈을 가져본다면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