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피부에 큰 눈, 소년같이 웃어보일 때는 영락없는 순수 청년의 모습을 보이다가도 미소를 감추고 서늘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할 땐 등골이 서늘해 진다. 군 제대 후 4년 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그는 선(善)이 아닌 악(惡)을 택했다.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이하 군도)에서 서자 신분의 탐관오리 조윤 역을 맡아 열연 한 것. 휘날리는 긴 머리카락과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 냉정한 눈빛과 미소까지 '백성의 적' 조윤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던 그가 눈에 물기를 가득 머금고 '서자'라는 이유로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는 모습은, 악역인 그를 마냥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16일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강동원은 오랜만의 스크린 나들이에 설레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4년만에 연기한 기분이 어땠냐"는 기자의 물음에 "재미있다. 정말 재미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것도, 현장에서 연기하는 것도 재미있다. 이보다 재미있는 일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그의 대답에 진심이 전해졌다.
-'군도'를 4년만의 복귀작으로 선택한 이유는.
"윤종빈 감독님에게 강하게 끌렸다. 처음 감독님을 만났을 때 '감'이 왔다. 감독님처럼 자기 작품에 대한 자신감이나 의도가 확실한 사람에게 끌린다. 무엇보다 '사람보고 선택했다'고 할 정도로 감독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사실 군 제대 후 복귀작으로 '군도'를 선택했을 때 주변 사람들 모두가 반대했다. 돌무치(하정우)가 극 전체를 이끌어 가는 영화고, 조윤의 비중이 적다는 이유에서 였다. 또 개성 강한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데, 그들에게 묻히는 거 아니냐는 우려의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그 엄청난 군도 무리들 사이에서도 잘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조윤 역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신경쓴 부분은.
"조윤을 표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점은 '삐뚤어짐'이라고 생각했다. 조윤은 서자로서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결핍된 인물이다. 악역이긴 하지만 조윤도 본인의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그 시대의 불쌍한 사람 중에 한명이다. 무조건 악해 보이려기 보다는 '삐뚤어진 인물'을 표현하려 했다."
-촬영이 끝난 후 쫑파티 때 많이 울었다고.
"아쉬웠다. 이 영화 촬영이 끝나는 걸 가장 아쉬워했던 사람이 나와 감독님이다. 동고동락했던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도 아쉬웠고, 개인적으로 조윤으로 더 지내고 싶었다. 오랜만에 영화를 시작한 거라 본래 컨디션을 찾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이제 내가 조윤이 된 거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영화 중반부가 넘어가고 있었다. 쫑파티 때 술도 마셨고, 노래가 쫙 깔리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펑펑 나더라. 나만 울었다.(웃음) 금산 역을 맡은 재영씨가 옆에서 '동원씨 정말 열심히 했다. 눈물이 날만도 하다'며 위로해줬다."
-악역이지만 참 아름답게 그려진다.
"아름답고 멋진 악역으로 보이는게 이 영화에서 내가 보여줘야 하는 것이었다. 거칠고 드센, 가끔은 짐승과도 같아 보이는 군도 무리들 사이에서 깔끔한 조윤의 모습은 영화의 볼거리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한다."
-'형사'에 이어서 검술 액션 연기를 선보였다.
"'형사'때는 검술을 따로 배우지 않았다. 그때는 무용을 하는 듯한 액션을 선보이기 위해 현대무용을 배웠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다섯달 정도 개인 트레이너와 함께 기본기부터 제대로 검술 훈련을 받았다. 훈련 과정이 워낙 탄탄해서 촬영하는 게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액션신을 촬영하면서 내가 스피드를 계속 올리니까 무술팀이 더 힘들어하더라. 훈련 막바지 쯤 됐을때는 트레이너 친구가 '형 이제 칼로 볏짚까지 베겠다'고 말하더라."
-긴 머리를 풀고 액션을 선보이는 신이 화제가 됐다.
"분장 팀장님이 그 장면을 위해 정말 신경을 많이 쓰셨다. 조윤을 '최대한 아름답게 표현하자'라면서 가발에 트리트먼트까지 뿌리시면서 굉장히 신경쓰셨다.(웃음) 사실 나와 감독님은 아름답게 보이기 보다는 무섭게 보이길 원했다. 그래서 단정히 흘러내리는 머리보다는 부스스하게 해야하는 거 아니냐고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분장 팀장님께서 절대 안된다고 하셨다. 무조건 아름답게 보여야 한다고 하셨다. 긴 머리때문에 액션 연기를 할때는 많이 불편했다."
-모든 배우들이 말타는 연기가 어렵다고 입을 모으더라.
"정말 어렵다 무섭기도 하다. 말타는 법을 알려주는 교관마저 흥분에서 날뛰는 말에서 떨어지더라. 그런데 다행이 말이 나를 좋아했다. 아마도 '군도' 출연 배우들 중 내가 제일 가벼워서 그런 것 같다.(웃음)"
-전작인 '형사'와 'M'에서도 악역 연기를 했는데.
"악역을 연기를 할때의 쾌감이 있다. 성격상 남에게 싫은 소리도 못하고, 화가나도 티를 잘 못낸다. 거절도 잘 못한다. 거절할 때 스스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그럴때마다 술을 마시며 푼다. 그래서 역할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괴롭힐 때 오는 짜릿한 쾌감이 있다. 내가 언제 마동석 형 같은 덩치큰 사람을 언제 괴롭혀보겠나.(웃음)"
-스트레스를 술로 풀 정도면, 주량도 상당할 것 같다.
"술은 즐겨 마시는 편이다. 주량은 잘 모르겠다. 컨디션에 따라 다르다. 기분 좋을때는 해가 뜰 때까지 마신다. '군도' 언론시사회가 끝나고 스태프, 배우들이랑 개봉 파티를 했는데 그날도 다음날 오전 6시까지 마셨다.(웃음)"
-'신비주의 배우' 이미지가 강하다. 일부로 '신비주의' 이미지를 고집하는 건가.
"성격 때문에 그런 이미지가 생긴 것 같다.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밖에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친한 사람들이랑만 만나고 낯도 많이 가린다. 말도 길게 하지 않는 편이다. 예전에는 인터뷰를 할때 말을 짧게 한다고 혼도 많이 났다. '좋냐'라고 물어봐서 '좋다'라고 대답한 것 뿐인데, 많은 분들이 '대답이 너무 짧다'고 타박하셔서 당황하기도 했다. 지금은 많이 혼나서 인터뷰하는 요령이 생겼다. '좋냐'고 물어보시면 좋은 이유까지 대답한다. (웃음)"
-하정우가 강동원 '상남자'라고 표현하더라.
"타협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몸이 아픈것도 잘 신경쓰지 않고 위험하다고 하는 것도 거침없이 하는 편이다. 그리고 '군도' 배우들 중에서 체력이 가장 좋은 편이다. 많은 분들이 나를 '도시 남자' 정우형을 '상남자'라고 보시는데, 완전히 반대다. 정우형이 겉모습만 보면 남자답고 모래같은 것도 뒤집어 쓰면서 운동할 것 같지만 전혀 아니다. 그 형은 손에 모래 묻히는 것도 싫어한다.(웃음) 정우형은 본인을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도시 남자'다. 나는 시계도 찰줄 모르고 향수도 뿌릴 줄 모른다.(웃음) 정우형이랑은 성격이 전혀 달라서 더 잘맞는 것 같다."
-하정우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보인다. '군도' 촬영 전에도 친분이 있었는가.
"전혀 없다. 2005년에 한 시상식에서 스쳐지나 간 적 밖에 없다. 당시 형은 '용서받지 못한자'로 신인상을 수상했고, 나는 '형사'의 최우수 작품상을 대리 수상했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많이 친해졌다. 호흡도 정말 잘 맞았다. 조만간 사극말고 현대극에서도 호흡을 맞추자는 이야기까지 나눴다."
-하정우가 자신의 연출작에 출연 요청을 한다면 출연한 의향이 있나.
"일단 작품을 보고 선택하겠다. 아무리 정우형이 출연하라고 해도 작품이 별로면 출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웃음) 일단 정우형이 아직 나에게 한번도 자신의 작품에 출연 제의를 하지 않았다."
-평소 대화를 나눌때는 말투에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묻어있다. 작품에서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연기할때는 억양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지금은 많이 극복했지만, 데뷔 초에는 사투리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표준어로 연기하는데, 외국어로 이야기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안믿으시겠지만 지금도 표준어라고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거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