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곳곳에서 동성애 지지 행진, 일명 ‘게이 프라이드 퍼레이드(Gay Pride Parade)’가 열리고 있다. 수많은 동성애자들이 그늘을 걷어내고 거리를 활보하는 동성애 지지 행진은 언제나 유쾌하다. 무지개 빛으로 치장한 참가자들은 보란 듯이 과감한 애정 행각을 보이기도 한다. 이들이 활짝 웃을 수 있게 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무너진 사회 질서를 바로 잡는 게 미국의 과제였다. 당시 미국은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배제했는데, 그 중 동성애자도 포함됐다. 1947년부터 3년간 동성애자들의 일자리 신청 1700건이 거부되고, 동성애자로 의심받는 공무원 420명이 해고됐다. 또한 4380명이 군에서 해임됐다. 당시 미국에서는 이성의 옷을 입는 것을 금지하고, 대학에서는 동성애자로 의심되는 학생과 교수들이 쫓겨났다. 동성애자들은 체포되어 신문에 보도 되는 등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다. 동성애자들은 결국 이중 생활을 하거나 은둔하는 등 점점 음지로 내몰렸다.
“경찰은 물 한 주전자를 끓어오르도록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 물이 끓어 넘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만 했다.”, 메레디스 베이컨 교수.
스톤월 항쟁, 사진 위키피디아
단지 성적 취향으로 차별 당했던 동성애자들이 1969년 6월 28일 울분을 터트렸다. 경찰들은 보통 이른 저녁 시간에 게이 바를 단속하곤 했다. 경찰들이 바를 습격할 때면 이성의 옷을 입거나 신분증을 제시하지 못한 사람은 체포되고, 나머지는 흩어졌다. 그런데 이날은 달랐다. 새벽 1시 20분, 유난히 늦은 시간에 경찰들이 미국 뉴욕시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게이 바 ‘스톤월 인’을 급습했다. 경찰들은 이날 따라 과격했다. 동성애자들은 과도한 폭력을 휘두르는 경찰에 저항했다. 경찰과 동성애자들이 대치하던 중 한 사람이 “게이의 인권을 달라”고 외쳤고, 이어 사람들은 한마음으로 “우리는 극복하리라”는 노래를 불렀다.
‘스톤월 항쟁(Stonewall Uprising)’이라 기록된 이날 사건 이후로 동성애 지지 움직임은 당시 민권 운동의 한 축이 되었다. 일년 후인 1970년 6월 28일 뉴욕 크리스토퍼 스트리트에서는 미국 역사 최초의 동성애 지지 행진 ‘퀴어 퍼레이드(Queer Parade)’가 열렸다. 이미 동성애에 대한 인식은 바뀌고 있었다. 뉴욕 타임스는 동성애 지지자들이 15개 블록에 걸친 길을 완전히 점령했다고 1면에 보도했다. 이후로 미국 주요 도시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동성애 지지 행진이 열렸다. 1990년엔 세계보건기구(WHO)는 질병 부문에서 동성애를 삭제한 5월 17일을 기념해 ‘세계 동성애 혐오 반대의 날(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로 지정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부터 ‘퀴어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지난 6월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동성애 지지자들이 서울 신촌 거리를 행진했다. 이날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큰 충돌 없이 행사가 마무리됐다. 지난해 9월에는 영화감독 김조광수와 김승환 레인보우 팩토리 대표가 최초로 동성 결혼식을 올렸다. 김조광수 감독은 본인의 혼인신고를 불수리처분한 서대문구청장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동성애자들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선과 차별은 한국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여전히 존재한다. 지난해 6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미성년자에게 ‘비전통적’ 성관계를 선전하거나 동성애자들에 대해 사회적 동등함이라고 알려줄 경우 처벌할 수 있는 반(反)동성애자법에 서명했다. 오스트리아 출신 가수 콘치타 부어스트가 유럽권 가요제인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참가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여장 남자 가수라는 이유로 대회 출전을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강선아 기자 sunnyk123@joongang.co.kr [사진 AP=뉴시스, AFPBBNews·로이터=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