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운칠기삼이라고도 한다. 그렇지만 요행만 바라다 눈 앞의 행운을 허망하게 놓쳐 버릴 수 있다.
'행운의 사나이' 서인국(27)은 악착같은 오기로 인생의 기회들을 모두 제 것으로 품었다. 이 모든 걸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엔 무던하게 땀 흘린 시간이 있었다.
'울산 촌놈' 서인국은 스무살이 되던 해 가수가 되겠다며 무작정 상경했다. 낯선 땅, 불안한 미래에 떨며 방황하던 청춘에게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70만대 1의 경쟁을 뚫고 Mnet '슈퍼스타K1'(09)에서 우승했다. 이후 탄탄대로가 기다릴 줄 알았지만 인생이 그렇게 녹록할 리 없었다. 케이블채널 프로그램 오디션 스타라는 이유 때문에 지상파 출연이 막혔다. 가수로 데뷔했지만 신곡을 마음껏 부를 무대는 없었다. 인생을 바꿀 연기 도전의 기회가 찾아왔지만 이 또한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다. 지상파 드라마 조연에서 시작해 케이블 드라마에서 첫 주인공을 맡았을 땐 캐스팅 논란이 따라붙었다. 부담은 더 컸지만, 그는 첫 주연작 tvN '응답하라 1997'(12)로 보란 듯이 톱스타 반열에 올라섰다. 이후 그는 가수로 또 배우로 놀랍게 성장하고 있다.
▶#1. 스무살, 가수의 꿈을 갖고 상경
-울산에서 처음 서울로 올라온 게 스무살 때인가요.
"TV에서 가수 김정민 선배님이 '슬픈 언약식'을 부르는 것을 보면서 가수가 되겠다고 다짐했죠. 고등학교 때까지는 울산에서 살았는데 그 지역에선 오디션의 기회가 많지 않았거든요. 대학(세한대 실용음악학과)을 다니면서 적극적으로 오디션을 보려고 서울에 올라왔어요. 그 때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서 서울 방배동에 사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같이 지냈어요. 그 때 매일 밤 늦게까지 연습하고 집에 들어갔는데 여러 가지 상황이 힘들고 서러워서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그렇게 몇 개월 지내다가 신림동 고시텔에서 혼자 생활하게 됐죠."
-서울살이가 꽤 힘들었는데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뭔가요.
"그 때부터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있었어요. 옛날 어른들은 장남이 가정을 일으킨다는 말도 했잖아요. 제가 장남이고, 동생도 있고 집안 환경도 좋지 않았으니깐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이를 악물고 가수로 성공해보자는 생각으로 버텼던 것 같아요."
-오디션은 많이 봤나요.
"많이 보지 않았어요. 4~5번 정도 봤어요. 오디션을 봤을 때 처참했죠. 살면서 그렇게 자존심 상하고, 비참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방송국에서 하는 오디션을 심사위원들이 리액션이나 코멘트라도 해주잖아요. 그런데 그냥 일반 오디션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관계자 분들이 저를 보지도 않고, 당연히 어떤 말씀도 안 하시더라고요. 혼자 민망하게 노래를 부르고 밖으로 나가는데 진짜 처참했어요. 그런 감정이 쌓이다 보니 어느 순간 오디션을 보기 겁 나더라고요. 그래서 한심하게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생활을 했죠. 그때 살도 많이 쪘고요."
▶#2. '슈퍼스타K' 우승자로 화려하게 데뷔
-그러다가 '슈퍼스타K' 오디션에 지원한거군요.
"사실 그때 나가기 싫었어요. 잘할 자신이 없었거든요. 사촌 형이 떨어지더라도 한 번 나가보라고 했고, 지금 앞뒤를 가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지원을 하게 됐어요. 매일 술만 마시고, 살만 찌는 한심한 제 자신이 싫었고, 그런 제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70만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 우승했어요.
"'슈스케'를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1등을 바라지 않았어요. 지원자들끼리 내부에선 '우승자가 미리 정해져 있다' '어떤 대형 소속사에서 우승자를 미리 넣어뒀다' 등의 소문이 돌았거든요. 그래서 생방송 무대에 설 수 있는 '톱10' 안에만 들자는 마음을 먹고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말도 안되게 1등을 한거죠. 1등을 하고 나서도 이제 가수 활동을 바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못 했어요. 어안이 벙벙했죠. 한동안 믿어지지 않았어요."
-그 해 성시경, 박효신 등이 속해 있는 젤리피쉬엔터테인먼트와 정식 계약 후 가수로 데뷔했어요.
"데뷔 앨범을 준비할 때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그런데 결과는 좋지 않았죠. 당시 아이돌 문화가 너무 강했을 때였고, 남자 솔로 가수로 신곡을 내는 분들도 잠깐 없었을 타이밍이었어요. 가수의 꿈을 이루긴 했는데 제대로 보여주지 못 하는 답답함과 좌절감도 있었어요."
-케이블채널 오디션 우승자라는 이유만으로 지상파 출연이 쉽지 않았어요. 지상파 음악방송에도 못 섰죠.
"그게 엄청 서러웠어요. 데뷔 앨범을 준비하면서 이런 어려움이 있을 줄 전혀 예상치 못 했거든요. 또 앨범을 저 혼자 열심히 한 게 아니라 모든 스태프들과 소속사 관계자 분들이 땀과 시간과 눈물, 열정을 투자해서 만들었는데 무대를 설 기회가 많지 않아서 속상했어요. 이런 상황이 다 제 탓인 것 같아서 같이 노력해준 분들에게 정말 미안했죠."
-KBS 2TV '남자의 자격' 합창단 편에 출연하면서 지상파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졌죠.
"활동 영역이 조금 넓어질 수 있었죠. 정말 큰 힘이 됐죠. '남자의 자격' 때 신원호 감독님을 처음 만났어요. 그땐 신원호 PD님이라고 부를 때였죠. 지상파 인기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게 해준 은인이죠. 그 인연으로 신원호 감독님이 CJ E&M으로 이적한 뒤 처음 만든 드라마 tvN '응답하라 1997'에도 출연했죠."
-활로를 열어준 덕분에 최근엔 케이블 오디션 출신 스타들이 활발히 지상파에 출연해요. 요즘 같은 시기에 데뷔했다면 편했을텐데라는 생각을 한 적은 없나요.
"'왜 항상 나는 첫 시험대에 오를까. 왜 나만 힘든 길을 갈까'라는 말을 많이 해요. 술 마실 때요. 다행히 힘든 일을 잘 잊어버리는 성격이에요. 그래서 술 마실 때 한탄을 하다가도 또 힘을 내서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어요."
▶#3. 연기 도전을 통해 발견한 또 하나의 꿈
-KBS 2TV '사랑비'(2012년)를 통해 연기에도 처음 도전했어요. 연기에도 관심이 있었나요.
"배우는 잘생기고 예뻐야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연히 저처럼 생긴 사람이 연기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죠. 그런데 서울에 처음 와서 방배동에 살 때 집 바로 밑에 연기학원이 있었거든요. 연기학원을 오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우와 재밌겠다'는 생각은 했어요. 막연히 생각만 하다가 정말 우연히 '사랑비' 오디션을 봤어요. 연기 트레이닝을 전혀 안 받은 상태로 윤석호 감독님을 뵈러 갔어요. 원래 제가 맡은 캐릭터가 서울말을 쓰는 설정인데 제가 준비한 사투리 연기를 보여드렸어요. 감독님이 그 모습을 너무 재밌어 하시는 거예요. 며칠 뒤 다시 미팅을 했는데 '같이 해보자'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리고 제가 맡은 캐릭터는 오디션 때 보여드렸던 것처럼 사투리를 쓰는 설정으로 바뀌었어요."
-연기 레슨을 받지도 않았는데 연기력 논란은 전혀 없었어요. 심지어 연기를 잘해 분량이 늘었죠.
"가수가 연기한다는 것에 대한 색안경이 있을 수 있고, 제가 연기 도전하는 것을 안 좋게 보시는 분들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수 서인국의 모습을 연기할 때 보여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일부러 살도 찌우고 눈이 더 작아 보이는 안경도 쓰고, 헤어스타일도 촌스럽게 했어요. 창모라는 캐릭터 뒤에 제 모습을 숨긴거죠. 그런데 그렇게 캐릭터를 구상한 게 좋은 공부가 됐어요. 그런 모습이 뭔가 감독님과 시청자들에게 통하는 기분이 들면서 연기를 하는 게 점점 신나더라고요. 매 장면을 미쳐서 연기했던 것 같아요."
-이후 바로 tvN '응답하라 1997' 주인공 윤윤재 역에 캐스팅됐죠.
"'남자의 자격' 때 만난 신원호 감독님이 CJ로 오시고 예능이 아닌 드라마를 제작 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이후 감독님이 미팅을 한 번 하자고 하더라고요. 감독님을 위해 모든 다 하겠다는 생각으로 미팅에 갔어요. 제가 무대에 설 수 있게 해준 분이고 은인이라 감독님 인생에 도움을 드리고 꼭 보답하고 싶었어요."
-드라마가 대박이 났죠. 인기는 언제 실감했나요.
"티저 영상이 나갈 때부터 심상치 않았어요. 반응이 오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더 겁이 났어요. 티저 반응이 말도 안되게 폭발적이었어요. 그래서 실망을 시키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촬영에 임했어요. 드라마가 방송된 후 반응이 뜨거워질수록 다행이다 싶었어요. 제가 이 드라마를 통해 뜨고 안 뜨는 건 중요하지 아니었어요. 폐를 끼치지 않고 감독님의 작품을 성공적으로 끝냈다는 것에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후 지상파 드라마로 복귀했지만, 그 인기와 성공이 이어지진 않았죠.
"그땐 케이블과 지상파 드라마의 갭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응답하라 1997'를 한 뒤 영화 제의는 많이 들어왔는데 지상파 드라마에서 출연 제의는 많이 들어오지 않았어요. 선택할 수 있는 게 한정적이었죠. 그러던 중 MBC '아들녀석들'이라는 작품을 만났어요. 이 작품 역시 제 인생에 큰 도움이 됐죠. 주말드라마라 호흡이 길었는데 덕분에 연기를 많이 배웠어요. 또 선배님들과 연기하면서 깊이감을 배웠어요. 매일 아침 첫 신과 밤에 찍는 마지막신은 저였어요. 체력적으로 굉장히 힘들었지만, 그로 인해 성장을 할 수 있었던 드라마였죠. 그렇게 긴 호흡의 연기를 해보지 않았다면 tvN '고교처세왕'에서 1인2역을 할 때 지쳤을 것 같아요. 끝까지 집중해서 연기하는 법을 '아들녀석들'로 터득했어요."
▶#4. 또 한 번의 터닝포인트가 된 '고교처세왕'
-최근 종영한 tvN '고교처세왕' 얘기도 빼놓을 수 없죠. 연기력 극찬도 많이 받고 드라마 성적도 좋았어요.
"의미 있는 작품이 너무 많지만, 이 드라마는 인생의 전환점이 된 드라마라 더욱 의미가 깊어요. 뭔가 성숙해진 느낌? 어른스러워진 느낌이 들어요. 캐릭터에 몰입해서 사는 동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성격도 얌전해졌어요. 사람들이 차분해졌다는 말을 많이 해요."
-1인 2역이라 몰입하기 더 힘들진 않았나요.
"민석인 굉장히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캐릭터였죠. 형석이는 정반대고요. 굉장히 신기한 건 몰입하면서 두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것이에요. 이번 드라마처럼 캐릭터의 감정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드라마 촬영이 끝난 뒤 순간 순간 공허함에 울컥하기도 하고, 눈물이 나려고도 했어요. 저도 제가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없었고 울컥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이런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이하나씨와의 키스신도 화제였죠.
"두 캐릭터 간의 아름다운 스토리가 있고 키스신을 찍을 땐 느낌이 좋아요. 그럴 땐 설렘이 있어요. '아들녀석들' 때는 바람을 피우는 설정에서 키스를 해서 스토리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고 감동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민석이와 정수영의 키스신은 달랐어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충분히 시청자들에게 전달된 뒤 키스신을 하는 거니깐 더욱 폭발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5. 가수 서인국 vs 배우 서인국
-가수로 데뷔했지만 배우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어요.
"어떤 걸 더 집중하겠다고 마음먹고 행동한 적은 없어요. 둘 다 사랑하기 때문에 비중을 나눌 수 없거든요. 가수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어요. 드라마 OST 작업도 했고, 앨범도 꾸준히 냈고요. 다만 배우로 활동할 때 반응이 더 좋아서 배우 비중이 더 커보일 수 있을 것 같아요."
-데뷔하고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데뷔 2년차 때요. 적응하는 과정에서 심적으로 힘들었어요. 또 그땐 꿈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더 힘들었어요. 오랜 꿈인 가수가 됐는데 정작 가수가 되고 나니깐 뭘 어떻게 더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다시 꿈을 꿔보자고 다짐했고, 그러면서 단독콘서트를 해야겠다는 꿈, 좋은 앨범을 내야겠다는 꿈 등이 생기면서 다시 삶에 의욕이 생겼죠."
-반면 데뷔하고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매번 갱신되고 있어요. 오디션에서 1등 할 때도 좋았고, 그 다음엔 데뷔할 때도 좋았어요. 음원차트 1위를 했을 땐 또 다시 인생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 됐죠. 모든 게 기쁜 일이라서 일을 하면서 계속 갱신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