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을 연기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 '나의 독재자'는 다소 엉뚱할 수 있는 이 질문을 가볍지 않게 풀어낸다. 그렇다고 러닝 타임이 지루할 정도로 무겁지도 않다. 배우 설경구는 이 속에서 묵직한 모습으로 중심을 잡아준다. '나의 독재자'는 첫 남북 정상 회담을 앞둔 1970년대, 회담의 리허설을 위한 독재자 김일성의 대역으로 선택된 무명 연극배우와 아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설경구는 김일성의 대역을 맡은 배우 김성근을 열연했다. 특수분장을 마다하지 않으며 아홉 살 차이가 나는 배우 박해일과 부자지간을 연기했다. 그는 23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난 김성근에 비해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운을 뗐다.
-영화 설정이 독특한데.
"부모와 자식에 관한 영화는 많이 있지만 좀 특이했다. 영화 중간에 (리얼하게) 당시 화면도 나오고 그런 구성이 재밌었다. 남북 정상회담 전에 시뮬레이션을 했다는 실제 이야기도 있고, 대한민국이 아니면 만들어질 수 없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22년 동안 배역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김성근이 이해가 됐나.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정상회담이 무산된 후 김성근은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이 됐다. '배우를 잡아먹는 역이 있다'는 대사가 나오지만 (김일성 역할에서 김성근이) 못 빠져나온 건지 안 빠져 나온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혹시 대사처럼 '잡아먹었던 배역'이 있었나.
"오래 남았던 건 아무래도 '박하사탕'(99)이다. 오래 잔상이 남아 힘들었고, 그 기간이 꽤 갔다. 주변에서도 너무 비교를 하시니까, 대표작이 굴레가 되는 듯 한 느낌이었다."
-그 정도였나.
"4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는데 (러닝 타임) 2시간 10분 만에 인생이 바뀌었다. 나를 소 닭 보듯 하던 일반인까지 알아보시더라. 영화 시사 후 술자리를 갔는데 그 유명한 강제규 감독과 안성기 선배 등 기라성 같은 사람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2시간 10분 만에 내 눈에 보이는 게 달라졌다."
-그때와 비교했을 때 팬들의 기대치가 높아졌다.
"뭘 더 보여줘야 할지 항상 고민이다. 해가 지나고 숙련이 되면 장인이 돼야 하지만 밑천이 다 떨어지는 느낌이다. 전혀 다른 게 나와야하는데 반복되는 모습이 싫다. 이번 영화는 소재가 신선했다."
-그래도 팬들은 설경구를 칭해 매소드 연기를 언급하기도 하는데.
"100% 창조는 없지 않나 싶다. 매소드는 100%를 원하는 것, 난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인물이 되려고 애를 쓰지만 완벽했던 적은 없다. 매소드는 진짜 미쳐야 한다. (굳이 한 명을 꼽자면) 히스 레저…그 사람은 매소드 같다. 거울을 보면 그 얼굴(조커)이 보였다고 하더라. 나는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그 점을 향해서 간다. 안 될 줄 알면서도 간다.(웃음)"
-실제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땠나.
"아주 안 좋았다.(웃음) 김성근의 또래, 그 시대의 아버지가 그렇듯 (아들과) 안 친했다.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많은 생각이 나더라."
-아들에겐 좋은 아버지인가.
"말 수가 많지 않다. 속정은 있지만 표현을 잘 못하는…"
-마지막 정상회담 장면이 압권이었는데.
"김성근이 달려온 시대의 마무리여서 부담이 많았다. 아들에게 보여주는 첫 공연이자, 22년을 기다렸던 공연 아닌가. 그걸 잘못 풀면 김성근 인생도 다 망가뜨릴 수 있었다. 정말 위험한 장면이었지만 마무리를 잘 한 거 같다."
-준비한 연기를 한 김성근은 행복했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아버지(김성근)는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기다렸고,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그 희망이 끓어지면 다 놔버리는…그래서 그것을 잡고 있었다. 오계장이 20년 후에 왔을 때도 반가워하지도 않고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늘 해왔던 거니까 그걸 한 것 뿐이다. 그 전에 (희망을) 놨다면 훨씬 더 빨리 죽었을 것이다."
-박해일과의 호흡은 어땠나.
"나이를 좀 전에야 알았다.(웃음) 전혀 부담이 없었다. (연기에 대해) 의심을 한 적도 없다. 술자리에서 해일이가 "아버지 아버지" 그랬다. 약간은 엉뚱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의외성이 있는 배우 같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