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지 않겠지만 24일 ‘범죄도시4’가 개봉되기 직전까지 전국 극장가에 개봉 중인 영화는 모두 48편이었다. ‘파묘’와 ‘듄2’가 여전히 상영 중이며 ‘쿵푸팬더4’가 1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댓글 부대’도 있었고 ‘고질라X콩:뉴 엠파이어’ 같은 괴수 영화도 있었으며 아카데미 수상작들이나 후보작이었던 ‘추락의 해부’나 ‘가여운 것들’ ‘패스트 라이브즈’도 찾아 보려면 어떻게든 볼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48편. 이 영화들이 ‘범죄도시4’의 개봉으로 순식간에 많이들, 거의 사라졌다.
그중 아까운 작품들은 ‘라스트 썸머’나 ‘골드 핑거’ ‘마더스’같은 영화들이다. 다분히 애매한 작품들로 분류되는 작품들이다. 이탈리아 영화 ‘키메라’나 일본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처럼 확실한 영화들은 그나마 예술영화관에서, 간신히 숨이 붙어 있는 형국이긴 해도, 살아 남아 있다. 예술영화라고 하기에 이래저래 사이즈가 좀 있거나 메이저 배급사가 담당하는 영화들은 ‘범죄도시4’같은 빅 샷 영화가 나오면 여지없이 종적을 감추게 된다. 스크린 수가 절멸 수준으로 급격하게 떨어지거나 상영 시간대가 거의 조조나 심야에 걸리는, 형식적인 상영 수준으로 유지되기 십상이다. 한국에서 수입배급업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 준다. 할리우드 배급사가 국내에 직접 배급하는 작품들이 아니면 거의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라스트 썸머’처럼 도발적인 작품은 이제 숨 쉴 공간이 거의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만든 프랑스 카트린느 브레야 감독은 2000년 ‘로망스’란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당시 한국에서는 서울 종로코아아트홀을 중심으로 한 단관 극장에서 개봉돼 문화적 충격파를 일으켰다. 영화 속에서 언시뮬레이티드 섹스, 곧 리얼 섹스 장면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극장가가 크게 들썩였다. 2000년을 전후해 일어났던 이른바 ‘뉴 코리안 시네마’의 흐름(홍상수 이창동 박찬욱 등으로 이어지던)은 이런 외화의 붐이 일조했던 측면이 크다. 무려 20 여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한번씩 뒤돌아봐야 하는 이슈다.
영화가 도발성을 잃거나 미래세대를 위한 공격적이면서도 의도된 일탈 행위를 저지르지 못하고, 전위적이고 기성 파괴적인 무엇인 가를 해내는 도전성을 상실하면 그 나라 영화 문화는 식상함의 원천이 되고 만다. 카트린느 브레야의 이번 새 영화 ‘라스트 썸머’는 의사(擬似) 근친상간을 소재로 다루되 흔히 지금의 사회가 얘기하는 도덕적 근간과 그 기준점을 상당 부분 이동시키고 있는 작품이다. 이런 걸 ‘기준점 이동 증후군’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영화나 이런 소설, 이런 창작품이 많아지면 사회적 윤리의 기준점이 어느 정도 이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게 좋은 건지 아닌 건지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매우 논쟁적이긴 하겠으나 분명한 것은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시키기는 한다는 것이다. 인간사, 세상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변화이며 변화하지 않는 사회는 오래 가지 못한다. 따라서 영화와 문화는 일탈의 행위를 강행해서라도 변화의 촉매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많은 문화인류학자들의 의견이기도 하다. ‘라스트 썸머’는 5000명 안팎의 관객을 모으는 데 그쳤다. 한국 사회가 변화를 멈추고 있다는 시그널일 수 있다.
또 다른 개봉영화였던 ‘마더스’ 같은 영화가 어느 정도 인정받는 수준이냐 아니냐는 것은, 그 나라 영화 문화가 고전에 대한 존중감이 있느냐 아니면 아주 찰나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냐를 가늠하는 것이었다. ‘마더스’는 리메이크 영화다. 프랑스 올리비에 마셰-드파스가 만든 2018년 영화 ‘마더스 인스팅트’가 오리지널이다. 그걸 ‘시클로’ 등을 찍었던 촬영감독 출신의 브누아 들롬 감독이 다시 만들었지만 영화를 잘 들여다 보고 있으면 1955년에 앙리 조르주 클루조가 만든 걸작 스릴러 ‘디아볼릭’의 여러 분위기 톤, 흔히 얘기하는 미쟝센이 많이 닮아 있는 작품이다. ‘디아볼릭’은 1974년 존 바담 감독이 ‘애증의 덫’이란 작품으로, 1996년 제레미아 체칙 감독이 같은 제목의 ‘디아볼릭’으로 연속해서 만들었다. 이 영화들처럼 ‘마더스’ 역시 중산층 가정의 위기나 진보적 가치를 지닌 지식인 세대의 퇴행적 음모와 갈등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런 영화가 안되고 외면 받았다는 것은 그 사회의 영화 문화가 끊임없이, 그리고 점차로 하향평준화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중이 마음껏 즐기는 영화는 항상 존재해야 한다. 대중은 위로 받아야 하며 고된 노동에서 중간중간 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중요한 존재 이유다. 그러나 가끔은, 아니 그같은 전반적 주조의 한 켠에서, 대중이 추앙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영화 지식인들의 해석과 번역이 필요한 작품들이 보란 듯이 존재해야 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영화 존재의 당위적 항목이다.
예술영화관, 작은 영화관의 상영작들이 기억되고 끈기 있게 소환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아마 예술영화관 지원금이 모두 끊겼다고 한다. 어쩌려고 그러는 걸까. 참 걱정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