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열 통신원은 영국 런던에 거주 중이다. 그는 런던러블리투어가이드 팀장을 맡고 있다. 또 잉글랜드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한국인 축구단 ACTS29 FC대표를 맡고 있다. 자연스럽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경기가 열리는 축구장을 즐겨 찾는다. 지소연과 윤석영 등 한국 선수들이 런던에 적응하는데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다. 앞으로 김상열 통신원이 매주 영국 현지 소식을 생생하게 전할 계획이다.
"시련은 있어도 좌절은 없다."
현대 그룹 신화를 썼던 고 정주영 회장이 남긴 말이다. 지난해 1월 런던으로 넘어온 윤석영(24·QPR)을 보면 떠오르는 문구이기도 하다. 그는 1년 9개월 동안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옆에서 지켜보면 안쓰러울 정도였다. 숱한 시련에도 윤석영은 좌절하지 않았다. 지난 18일(이하 한국시간) 그에게 연락이 왔다. 밝은 목소리로 리버풀과의 2014-2015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8라운드에서 선발로 나올 것이라고 했다. 경기 전날부터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윤석영은 "특별한 일이 없다면…(선발로 나와요)"이라고 답한다.
지난 19일 로프터스 로드 스타디움. 두 시즌 전 박지성이 몸 담았던 퀸즈파크레인저스(QPR)의 홈경기가 열렸다. 윤석영이 EPL 데뷔전을 치렀다. 지난 시즌 준우승팀 리버풀을 상대로 선전했다. QPR은 2-3으로 패하며 강등권 탈출에 실패했다. 경기를 마치고 만난 토니 페르난데스 QPR 구단주는 "윤석영이 오늘의 맨 오브 더 매치(Man of the match)다. 그는 정말 열심히 하는 선수"라며 "앞날이 기대된다"고 극찬했다. 이날 저녁 윤석영을 만났다. 그는 "결과가 좋았어야 한다"며 계속 아쉬움을 삼켰다. 21개월 동안 윤석영이 겪었던 시련을 봤기에 자책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더 짠했다.
◇ 맨시티도 관심 가졌던 윤석영 이적 뒷 이야기
2012년 런던올림픽은 윤석영의 삶을 바꿨다. 한국은 올림픽 축구 역사상 첫 동메달을 수확했다. 붙박이 왼쪽 수비수로 출전한 윤석영도 병역혜택을 받았다. 올림픽 직후 인상적인 활약으로 EPL의 여러 구단으로부터 영입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올림픽 이전에도 호펜하임(독일)의 관심을 받았던 그는 빅클럽들의 제안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QPR 과 풀럼뿐 아니라, EPL의 명문 맨체스터 시티(맨시티)에서도 제안이 왔다고.
하지만 윤석영은 전남을 떠나지 않았다. 유스시절부터 몸을 담았던 전남이 2012년 가을 힘든 시즌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남은 연패를 거듭하며 강등권에 머물렀다. 윤석영은 “하석주 감독님도 필요하다고 하시고, 팀과 의리 때문에 떠날 수 없었다”고 떠올렸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선수이기 전에 남자였다. 윤석영은 팀을 강등에서 구하고 2013년 1월 QPR로 이적했다.
윤석영은 풀럼과 QPR을 사이에 두고 고민했다고 한다. '한인타운과 가까운 풀럼으로 왔으면 좋았을텐데'라고 묻자 그는 "저도 그러고 싶었어요. 그런데 상황이 제 바람과는 상관없이 흘러갔죠"라고 한다. '박지성 때문에 QPR로 갔니'라고 되묻자, 윤석영은 '지성이형 때문도 아니에요"라고 말하며 한숨을 푹 내쉰다. 아직 말할 수 없는 무언가 있는 듯하다.
◇ 시련의 시작, QPR에 이적을 요구
엘리트 코스를 밟은 윤석영은 벤치와 친하지 않다. 그러나 EPL의 벽은 넘기 쉽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고 준비해도 경기에 나갈 수 없었다. 그러던 사이 QPR은 잉글랜드 챔피언십(2부 리그)으로 강등됐다. 챔피언십에서 돈캐스터로 임대도 떠났다. 몇 번의 출장도 있었다. 지난 3월 23일 미들스보로 전에선 MOM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무엇인가 풀릴 줄 알았는데, 또 다시 교체 또는 벤치 신세였다. 브라질 월드컵 출전도 사실상 포기했었다고 한다. 기사에는 윤석영을 조롱하는 악플이 달리기 시작했다. 시련이 이어졌다.
윤석영은 QPR의 해리 레드냅 감독에게 이적을 요구했다. 그때마다 레드냅 감독은 "기다리라"고 답했다고. '힘들었겠다'는 말에 윤석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힘들었죠. 그런데 레드냅 감독 탓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실 그 감독님이 절 원한 것이 아니었어요'라고 한다. 멋쩍은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음을 보인다.
◇ 시련의 연속, 브라질의 아픔
지난 5월 윤석영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브라질 월드컵 최종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선발되자마자 말도 많았다. 윤석영은 겸허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기쁘거나 미안하다는 마음보다 무조건 잘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결과는 좋지 않았다.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1무 2패를 당하며 탈락했다. 올림픽에서 동메달 신화를 썼던 홍명보 감독도 자진사퇴했다. 월드컵 이야기를 하면 윤석영은 "정말 힘든 순간이었죠"란 말을 되풀이한다. 그는 "선수들 모두 열심히 했어요. 다만 결과가 너무 안 좋아서 국민들께 죄송한 마음이죠"라고 한다. 안티 팬은 더 늘었다. 여기에 발목 부상이 찾아왔다.
큰 아픔 뒤에 빛은 없었다. 소속팀 QPR에서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주전 왼쪽 수비수 자리는 아르망 트라오레(25)로 낙점됐다. 윤석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감독과 면담을 요구했다. 윤석영은 "레드냅 감독에게 '벤치에만 둘 것이라면 난 이적하겠어요'라고 강하게 말했어요. 그런데 레드냅 감독은 '윤은 이적불가다. 꼭 쓸 것이다'라고 답했어요"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또 기약 없는 기다림이 이어졌다.
힘든 시기를 보내던 당시 윤석영은 목회자인 필자에게 "분명 기회는 오겠죠"라고 묻곤 했다. 그때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면 기회는 꼭 올것이다. 준비된 그릇이 쓰임을 받는다'며 '참고 견디자'고 했다. 힘든 내색을 한 번도 안했던 윤석영이다. 항상 주변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재능이 있다. 유머도 넘치고,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다. 장난도 잘 치고 활기가 넘친다. 털털하고 멋진 남자다. 그런 그가 이렇게 물어 올 때, '오죽했으면…'이란 생각이 들었다.
◇ 좌절은 없다…주전 도약의 기회
1년 9개월 만에 윤석영은 EPL에 데뷔했다. 사실 뛰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15일 윤석영에게 연락이 왔다. 안부전화인 줄 알았다. 그런데 "런던에도 침을 잘 하는데가 있어요"라고 묻는다. 갑자기 허리가 아프다고 한다. 레드냅 감독이 '리버풀 전에서 출전할 것이니 준비를 잘하라'고 말한 그날이라고 한다. 이틀간 윤석영은 운동도 못하고 치료에 집중했다. 윤석영은 울듯한 표정으로 "이번에도 못 뛸 것 같아요. 어떻게 온 기회인데…"라고 한숨을 쉰다. '포기하지 말라'는 말에 그는 "저 포기 안해요"라며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윤석영은 17일부터 달리기를 시작했다. 기적과 같이 몸이 움직였다고 한다. "몸이 무거운 것 빼고는 괜찮아요"라며 활짝 웃었다. 윤석영은 1년 9개월의 한을 피치에서 쏟아냈다. 미친 듯 뛰었고 잉글랜드의 특급 유망주 라힘 스털링을 봉쇄했다. 비록 팀은 2-3으로 패했지만, 윤석영은 영국 언론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경기 후 칭찬이 쏟아졌다. 그러나 윤석영은 그 기쁨에 도취되지 않는다. "이제 시작인걸요"라고 말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QPR은 28일 애스턴빌라와 EPL 9라운드 홈경기를 갖는다. 그리고 내달 1일에는 첼시를 상대한다. 시련을 이겨낸 윤석영은 또 출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런던=김상열 통신원, 정리=김민규 기자 gangaeto@joongang.co.kr 사진=김상열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