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올림픽대표가 돼야죠. 우리나라 대표선발전이 웬만한 국제대회보다 더 치열한 거 아시잖아요."
한국 남자 양궁의 '간판' 김우진(24·청주시청)은 신중했다. 목청껏 '화이팅'부터 내뱉고 보는 또래 국가대표들과는 달랐다. 대신 매번 2~3초간 머릿속으로 할 말을 그린 후 답했다. 리우 올림픽 출전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만약 나가게 된다면'란 '안전장치'를 빼놓지 않고 달았다. 마치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과 마주하는 것처럼 빈틈이 없었다.
리우 올림픽 출전까지는 아직 3월부터 시작되는 3~4차 선발전이 남았다. 하지만 김우진 만큼은 안심해도 될 법하다. 그는 2015년 세계에서 가장 날카로운 궁사였기 때문이다. 김우진은 지난해 1·2차 월드컵(5월) 남자 개인에서 나란히 은메달을 목에 걸며 예열을 마친 뒤 세계선수권(7월)에선 당당히 2관왕(남자 개인·단체)에 올랐다. 상승세를 탄 그는 리우 올림픽 전초전격인 프레올림픽(9월)마저 석권했다. 김우진은 국제양궁연맹(FITA)이 발표한 리커브 남자부문 세계랭킹 1위(1월 기준)를 달리고 있다.
지난 14일 서울 태릉선수촌 양궁장에서 만난 김우진은 "올림픽의 해가 원숭이의 해라고 하니 설레기도 해요. 왠지 잘 풀릴 것 같은 느낌도 들고요.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올림픽 출전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는 아니잖아요"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원숭이띠 올림픽 국가대표를 차례로 만나는 본지의 '신년 릴레이 인터뷰 시리즈'의 다섯 번째 주인공이다.
김우진은 이미 한 번의 좌절을 겪었다. 그는 2012 런던 올림픽 전까지 실패를 몰랐다. 충북체고 3학년 시절인 2010년 처음 국가대표에 선발된 김우진은 같은 해 열린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2관왕(개인·단체)을 거머쥐었다. 이때부터 그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김우진은 이듬해인 2011년 세계선수권에서도 개인과 단체전을 싹쓸이하며 세계 양궁의 최강자로 우뚝 섰다. 기세대로라면 런던 올림픽 금메달 획득도 유력했다.
"당시엔 나가는 대회마다 잘 맞았어요. 주변에선 '넌 올림픽을 나갈 수밖에 없어', '내가 100% 장담해'라고까지 말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어린 나이에 이룬 '고속성장'은 독이 됐다. "칭찬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나태해졌어요. 안일해졌고 방심을 하게 된 거죠." 잘 나가던 김우진에게 하필 2012 런던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을 앞두고 경기력 저하가 찾아왔다. 결국 그는 최종선발전에서 4위에 그치며 3위까지 주어지는 런던행의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90도로 수직 상승하다 한 번에 (날개가) 꺾이니 완전 '멘붕'이었어요. 올림픽에 대한 집착은 심리적 압박으로 돌아왔어요."
추락은 계속됐다. 올림픽이 좌절 된 그는 깊은 슬럼프까지 찾아왔다. "활이 안 맞기 시작했고 성적이 안 좋으니 불안해지더라고요. 장비까지 바꿔봤는데 소용이 없었어요. 이러다 운동을 아예 못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우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독하게 버텼다. 그는 소속팀에서 하루종일 활만 쏘며 어떻게든 초심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연습량을 늘렸어요. 태릉선수촌에서 평균 400~500발 쐈다면 600~700발까지 시도했어요. 그러면 다음날 손이 퉁퉁 붓기도 해요."
동시에 선배들의 장점은 모두 흡수했다. "우리 팀엔 엄청 성실하고 열심히 운동하는 선배들이 많아요. 그런 분들 옆에서 같이 운동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주말에도 안 쉬고 개인훈련하는 모습을 따라가게 되더라고요." 롤모델인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박경모(41)공주시청 감독의 조언도 힘이 됐다. 그는 슬럼프에 빠진 후배에게 늘 "'괜찮다. 나도 그랬다'"며 극복 의지를 심어줬다.
덕분에 바닥을 쳤던 김우진의 성적은 조금씩 회복됐다. 2012~2013년, 2년간 국내대회만 출전하며 재기를 준비했던 그는 2014년부터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김우진은 그해 2차 월드컵에서 개인 3위에 오르며 국제무대에 다시 등장했다. 그리고 2015년엔 국가대표에 선발되는 기쁨을 다시 누렸고 세계선수권에선 4년 만의 개인전 우승까지 이뤘다.
그동안 김우진은 단단해졌다. 지난 4년간의 시련을 극복하면서 나이답지 않은 진중함은 물론 남다른 끈기까지 생겼다.
"올림픽에 조심스런 반응을 보인 건 한 번 아픔을 겪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자기방어적 태도를 취하는 걸 수도 있어요. 사실 원래 좀 신중한 성격이기도 하고요."
마음 고생이 심해 얼굴도 늙은 것 같다고 말하자 "30대 초반까지도 본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김우진의 사전에는 두 번의 실패는 없다. 빈틈없이 준비해 국가대표에 선발돼 브라질 땅을 밟겠다는 각오다. "4년 전 선발전 탈락은 실패라고 생각 안 해요. 오히려 이번 올림픽을 준비하는 데 좋은 경험이 됐어요. 지난 번처럼 서두르지 않고 대표선발전부터 침착하게 준비하겠습니다."
그래도 올림픽 꿈에 대해 듣고 싶어 한 번 더 물었다. 김우진은 그제서야 속마음을 들려줬다. "사실 잠들기 전에 리우금메달 따는 상상을 해요. 누군가 상상을 하면 그대로 이뤄진다고 했거든요. 기운이 좋습니다. 올림픽 출전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메달을 따고 싶습니다. 그건 금메달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