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프로야구 다이요 훼일스 출신 윤차랑(1941~1979)은 1965년 북한으로 건너가 1970년대까지 북한 야구의 에이스로 뛰었다. 하지만 일본에 남은 누나 윤춘자씨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본지 3월 1일 보도, 윤차랑, 평양으로 떠났던 일본 프로야구 출신 재일동포 투수)
북송 39년째 해에야 북한에서 가족을 만나 동생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식민지배와 분단의 아픔은 야구인 가족에게도 비극이었다.
북한이 아닌 남한을 택한 한 재일동포 야구인도 북송의 아픔을 겪었다. 1960년대 국가대표 선수와 실업야구 스타로 활약했던 배수찬(1937~1986) 전 기업은행 감독이다. 일본 도쿄의 에바라고를 졸업한 배수찬은 1957년 제2회 재일동포학생모국방문야구단의 일원으로 모국을 처음 방문했다. 야구 선수로 계속 뛰고 싶었던 그에게 낯선 모국은 또다른 기회였다. 배수찬은 1959년 일본에서 열린 제 3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태극마크를 단다. 그리고 1960년 교통부를 거쳐 1962년부터 기업은행에서 뛰었다.
당시 한국 야구에선 대단한 선수였다. 김영덕 초대 OB 감독은 “내 한국 실업야구 첫 해인 1964년 배수찬이 타격왕을 차지했다. 매우 정교한 왼손 타자였다. 장효조와 비슷했다”고 회상했다. 기업은행 후배인 박용진 전 LG 2군 감독은 “국내 선수와는 기본기부터가 달랐다”고 평가했다.
박 전 감독은 선배 배수찬을 잘 따랐다. 박 전 감독은 “말수가 적은 분이었다. 개인사에 대해선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술은 자주 마셨다. 통음을 했다”고 회상했다.
1968년께였다. 어느날 팀에 배수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박 전 감독은 “30~40일이 지나서야 팀에 돌아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은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어머니와 친척이 북한에 거주하고 있다는 게 이유 중 하나였다. 박 전 감독은 "서신 교환이 문제가 된 것으로 안다"고 했다.
1959년부터 시작된 북송사업으로 재일동포 9만3000여 명이 북송선을 탔다. 배수찬은 일본으로 건너가 어머니를 설득했지만 막지 못했다. 그 뒤로 배수찬은 어머니를 볼 수 없었다. 1968년 1·21 사태가 일어난 뒤 정부는 재일동포 출신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여기에 배수찬이 걸려들었다.
박 전 감독은 “배 선배는 다른 재일동포와는 달리 한국말을 잘 했다. 중학교 과정을 조총련계 조선학교에서 이수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임호균 전 삼성 코치는 “그 때문에 배 선배가 정보기관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았다고 알고 있다”고 했다.
배수찬은 1985년 OB 2군 감독을 그만 둔 뒤 아르헨티나로 떠난다. 박 전 감독은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싶어했다”고 회상했다. 일본과 아르헨티나를 오가며 생활하던 배수찬은 1986년 당뇨병으로 유명을 달리 한다.
동시대 사람들도 배수찬의 사연을 알지 못했다. 이용일 한국야구위원회(KBO) 초대 사무총장은 “배수찬은 아주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런 일이 있었는가”고 놀라워했다. 김영덕 전 감독은 “일본 프로야구 난카이 시절부터 배수찬과 친분이 있었다. 국내에서도 자주 만났지만, 재일동포 선수끼리는 가족사를 잘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북송에 얽힌 배수찬의 사연은 2015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 에서 처음 다뤄졌다. 아들 배형석씨는 “영화가 개봉된 뒤에야 아버지의 사연을 알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영화를 제작한 김명준 감독은 “배수찬씨의 사연은 우연히 알게 됐다. 아팠던 시대의 단면”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