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세기의 대결'로 바둑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이로 인해 각 분야의 바둑 고수들에 대한 관심도 높다.
한국 축구계에도 고수들이 많다. 허정무(61) 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가 고수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런데 허 부총재를 능가하는 숨어 있는 최고수가 있었다. 바로 김정남(73) 한국 OB축구회 회장이다.
기력은 아마 4단. 선수 시절 한국 축구 간판 수비수였다. 감독으로서 지난 1986 멕시코월드컵, 1988 서울올림픽을 지휘했다. 또 K리그 명가 울산 현대 최장수 감독이기도 하다.
한국 축구 큰 어른이자 산증인이다.
수많은 대회를 치르고 결실을 낼 때 옆에는 항상 바둑이 있었다. 바둑에서 배운 지혜는 축구의 원동력이었다. 일간스포츠는 16일 서울 용산구 효창운동장 한국 OB축구회 복지관에서 김 회장을 만났다. 그로부터 축구와 바둑, 그리고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 회장에게 그 세 가지는 같은 존재였다.
◇축구와 바둑 그리고 인생
-바둑을 언제 시작했나.
"아주 어릴 때 시작했다.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다. 동네바둑이고 어깨 너머로 배웠다. 당시에는 바둑 TV도 없어 신문을 통해서 많이 배웠다. 조훈현과 서봉수가 두는 것을 특히 많이 봤다. 나 역시 이창호에 열광한 사람이었다."
-바둑 실력은.
"아마 4단이다. 1986년 한국기원에서 정식으로 공인을 받았다. 당시 나와 야구의 박영길 감독이 둔 것이 바둑책에 소개될 정도였다."
-매력은 무엇인가.
"경기가 끝난 뒤 항상 바둑을 뒀다. 바둑은 떠들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조용히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두는 것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표현을 하지 못한다.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 마음이 수양된다. 산만하면 바둑을 두지 못한다. 집중력이 높아진다. 이창호처럼 돌부처가 돼야 한다. 바둑을 하다 보면 웬만한 일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
-바둑과 축구의 닮은 점은.
"바둑알도 축구공도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다. 사람으로 인해 생명을 받는 것이다. 멋진 골이 들어가거나 필살의 한 수를 던질 때 너무나 아름답지 않은가. 축구는 11명이 하고 바둑은 1명이 한다. 하지만 한 수 한 수가 모여 바둑을 이루는 것이다. 축구도 바둑도 모든 플레이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조화가 중요하다. 그것이 무너지면 축구도 바둑도 망한다. 이기고 있다고 방심해서는 안 되고 욕심을 내서도 안 되는 것 역시 닮았다. 우리가 사는 인생과 같다."
-복기도 공통점 같다.
"바둑에서 복기는 중요하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경기 뒤 언제나 비디오 분석을 한다. 왜 이겼는지 왜 졌는지 복기한다. 잘한 것은 키우고 잘못한 것은 고치기 위함이다. 상대팀도 철저하게 다시 분석한다."
-성동격서를 좋아한다고.
"왼쪽을 공격하는 것처럼 하다 반대쪽에서 찬스를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바둑도 그렇고 축구도 이런 전술을 즐겨했다. 동쪽을 노리는 것처럼 하다 때를 기다린다. 힘을 모아 놨다 한 방에 서쪽을 친다."
-세기의 대결은 봤나.
"물론이다. 그런데 알파고는 우리가 두는 것과 다른 방법으로 둬 해설에 집중했다. 인공지능은 수많은 서버와 장치들을 동원해서 하는데 이세돌은 혼자였다. 개인적으로 이세돌과 함께 박정환, 박영훈, 최철한 등 고수들이 상의해서 뒀으면 어떨까 생각도 해봤다."
-이세돌 스승 권갑용 8단과 인연이 있다.
"권 사범과 친분이 있다. 권 사범에게 제대로 배웠으면 이세돌처럼 되지 않았을까. (웃음) 권 사범이 축구를 좋아한다. 바둑인 축구단 비마 축구단을 창단하기도 했다. 내가 바둑을 좋아하다 보니 서로 친해졌다. 권 사범이 '바둑과 축구는 한 군데 집중하면 안 된다. 고수들은 멀리 보고 유기적으로 모든 것들을 연결시킨다. 공만 보고 따라다니는 벌떼 축구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 전체를 봐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축구인 최고수라고 들었다.
"예전 한창 많이 둘 때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열심히 두지는 않는다. 허정무가 고수다. 몇 번 둬봤는데 이겼다 졌다 했다. 허정무는 꾸준히 두고 있어 지금 붙으면 내가 질 것이다. 바둑도 축구처럼 꾸준히 훈련하지 않으면 실력이 줄어든다."
◇인생 최고의 묘수
바둑에서 ‘묘수’는 수가 나지 않을 듯 한 곳에서 나타나는 절묘한 수를 말한다. 김정남은 축구에서 역사적 묘수를 던졌다. 지난 1985년 열린 멕시코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한일전 2경기였다. 묘수는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일본 원정 1차전에서는 2-1 승리를 거뒀고, 홈 2차전에서는 1-0으로 이겼다. 한국은 지난 1986 멕시코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한국의 8회 연속 월드컵 진출의 시발점이었다.
-인생의 묘수를 꼽는다면.
"멕시코월드컵 최종예선 한일전 2경기다. 승리해야 월드컵에 갈 수 있었다. 한일전을 앞두고 고민을 많이 했다. 그리고 묘수를 던졌다. 최순호였다."
-최순호가 왜 묘수였나.
"최순호는 스피드, 슈팅, 헤딩, 크로스, 패스 등 모든 것을 갖춘 최전방 공격수였다. 일본 수비의 집중수비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최순호를 수비가 몰리는 중앙에만 놓지 않고 사이드로 빠지게 했다. 오른쪽, 왼쪽 마음껏 다니라고 했다. 수비가 최순호로 인해 분산됐다. 이 전술이 2연전 모두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 1985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전의 한국팀 벤치모습 . 사진 右 김정남 감독. 사진출처 = 중앙포토 DB ] -어떤 효과를 봤나.
"3골 모두 최순호의 발에서 나왔다. 첫 골은 최순호가 사이드에서 크로스를 올렸는데 일본 수비수 맞고 나왔다. 이것을 정용환이 골로 연결시켰다. 두 번째 골도 최순호가 사이드에서 패스한 것을 이태호가 수비수 한 명을 제치고 골을 넣었다. 홈 2차전에서도 최순호가 사이드에서 들어와 슈팅을 때린 것이 골대 맞고 나왔다. 이것을 허정무가 달려들어 넣었다."
-묘수는 월드컵으로 이어졌다.
"월드컵 조별예선 3차전 이탈리아 전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왔다. 최순호가 왼쪽에서 가운데 들어가 슈팅을 때려 골을 성공시켰다. 최순호의 월드컵 첫 골이 그렇게 탄생했다. 묘수는 우연이 아니다. 사이드에서도 활약할 수 있는 선수라 믿었고 훈련도 많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