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태영 수원 FC 구단주가 세게 나왔더라고요. 우리를 이기고 깃발을 꼽겠다뇨.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허허"
지난 12일 성남시청 시장 집무실에서 만난 이재명(52·성남 시장) 성남 FC 구단주는 악수를 건네기도 전부터 '깃발' 얘기였다. 최근 며칠 동안 염태영(56·수원 시장) 수원 FC 구단주에게 하고 싶은 말이 꽤 많이 쌓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성남과 수원 FC는 올 시즌 '축구 전쟁' 중이다. 일명 '깃발라시코'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양팀 구단주들의 설전에서 비롯됐다. 시작은 이 구단주였다. 그는 지난달 2일 수원 FC전을 앞두고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를 통해 "이긴 팀 시청 깃발을 진 팀의 시청에 걸자"고 '20년지기 절친' 염 구단주에 도발했다. 이 구단주를 잘 아는 염 구단주는 곧바로 대응했다. 염 구단주는 이틀 뒤 "축구 명가 수원서 멍석 깔고 기다리겠다"며 재치있게 반격했다.
이 모습을 본 축구 팬들은 두 구단의 자존심 싸움을 두고 '깃발라시코'라는 애칭을 만들었다. '깃발'과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명문팀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라이벌전 '엘 클라시코'를 빗대 만든 합성어다. K리그 클래식의 시민구단을 대표하는 두 팀이 경쟁을 통해 돌풍을 일으키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두 구단주가 펼친 장외 대결의 불꽃은 그라운드 위로 옮겨 붙었다. 선수단과 팬들의 자존심 대결로 발전한 셈이다. 지난달 19일 K리그 클래식 2016 2라운드를 통해 이뤄진 성남과 수원 FC의 첫 맞대결은 치열한 공방전에도 승부를 가리지 못한 채 1-1로 끝났다. '깃발라시코'는 올 시즌 초반 K리그 최고의 얘깃거리다.
본지는 이 구단주에 앞서 지난 3일 염 구단주를 인터뷰 했다. 염 구단주는 그때 "언젠가 성남을 꺾고 성남의 홈 구장인 탄천종합운동장에 수원 FC의 깃발을 꽂겠다"며 이 구단주를 비롯한 성남 팬들을 자극했다. 이어 "성남 간판 공격수 황의조가 탐난다"는 말로 수위를 높였다. 염 구단주의 인터뷰를 자세히 읽었다는 이 구단주는 작심한 듯 수원 FC를 향해 경고의 메시지를 날렸다.
-리그 선두(인터뷰 당시·현재는 3위)인데 구단주로서 어깨에 힘 좀 들어가겠다. 수원 FC를 도발하기엔 좋은 시점 아닌가.
"이제 겨우 4경기 치뤘다. 기대 이상의 성적이다. 하지만 리그 제도의 특성상 막판까지 가봐야 아는 거다. 지금은 쌓은 승점들이 한 시즌을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
-프로팀 감독들이 할 법한 대답이다. 이젠 축구인이 다 된 것 같다.
"서당개 3년이면, 구단주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3년 전엔 축구를 전혀 몰랐는데 요즘은 새벽에 아내와 해외축구까지 챙겨는보고 있다. 일주일 내내 성남 경기가 기다려질 정도다. 상대 팀 선수 이름과 특징까지도 알고 있을 정도니 나도 '축빠(광팬을 뜻하는 은어)'가 다 된 것 같다."
-염 구단주가 인터뷰에서 꽤 수위가 높은 발언으로 성남을 자극했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알면 하룻강아지가 아니다. 허허"
-염 구단주는 황의조를 원하고 있다.
"굳이 말로 안 해도 염 구단주 마음은 알 것 같다. 나도 마음 속으로는 바르셀로나의 리오넬 메시를 데려오고 싶다. 하지만 메시를 원한다고 말을 하진 않는다. 우리 황의조를 탐내는 것도 마음 속으로만 했어야 했다. 물론 수원 FC는 하룻강아지니까 이해는 한다. 하하"
-다음 '깃발라시코'에선 한 수 가르쳐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다음 수원 FC와의 대결을 앞두고 골 예고를 해야 할 것 같다. 수원 FC는 황의조에게 골 먹을 것이다. 황의조를 품으려던 수원 FC에게 대량실점을 선물하고 싶다."
-구단주가 적극적으로 참여한 덕분에 '깃발 전쟁'이 축구 팬들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K리그 내 새로운 스토리를 발굴하고 싶었다. 스포츠는 가볍고 재미있어야 사람들도 쉽게 관심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언론이나 축구팬들이 깃발 전쟁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서 새로운 스토리에 얼마나 목말라 하고 있는 지를 느꼈다. 스포츠는 하나의 문화 산업이다. 그래서 이렇게 팬들이 관심 갖고 좋아할 만한 걸 끊임없이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가운데 올 시즌 승격한 수원 FC가 보였다. 성남과 수원 FC, 두 구단간의 경쟁을 격화시킬만한 것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염 구단주와는 오랫 동안 알고 지낸 데다 같은 시장이라는 공통점도 있어서 이야기가 잘 통했다."
-'깃발라시코'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생각도 있나.
"물론이다. 라이벌이 있어야 구단도 발전하듯, 끊임없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 '깃발 전쟁'이 축구 팬들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만들 생각도 있다. 무언가를 걸어야 할텐데 현재로선 (새로운 아이템을) 연구 중이다."
-'깃발 전쟁' 2탄은 무엇을 고려하고 있나.
"식상하면 안 된다. 아이템을 남발해도 안 된다. 그래서 팬들의 생각을 들을 예정이다. SNS를 통해 '하룻강아지 수원 FC를 혼내주는 가장 잔인한 방법'을 공모해 결정할 것 같다. "
2014년 시민구단으로 재창단한 성남의 꿈은 '전통의 강호'로 불렸던 전신 성남 일화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올 시즌 성남은 일화 시절과 닮은 점이 많다. 황의조, 김두현 등 토종선수와 티아고, 피투 등 외국인 선수들의 호흡이 잘맞아 막강한 전력을 뽐 내고 있다는 평가다. 성적이 뒷받침하고 있다. 선두를 달리던 성남(승점11)은 지난 13일 전남 드래곤즈전에서 0-0으로 비기며 FC 서울(승점12)에 밀려 2위가 됐다가 현재는 3위다. 개막 뒤 5경기 무패 행진(3승2무)을 질주했으나 16일 전북에 패해 순위가 밀렸다. 그러나 3년 차 시민구단 성남이 우승도 충분하다는 분석도 있다.
-성남의 초반 돌풍, 예상은 했나.
"작년에도 잘했지만 올 시즌엔 정말 모두가 놀랄만한 성적을 올릴 거란 믿음은 있다. 물론 시즌 초반 1위를 할 줄은 몰랐다. 중요한 건 이제부터인 것 같다."
-성남의 올 시즌 목표는.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이 주어지는 3위 이내에 드는 게 목표다. 최하 성적이 3위라는 말이다."
-최하 3위라는 건 전북 현대와 FC서울을 의식한건가.
"당연히 그 두 팀과 경쟁하지 않겠나. 우리는 선수 수급에서 전북과 서울을 따라갈 수 없다. 하지만 상위권, 보통 1~4위 팀들의 실력 차이는 미세하다. 정신력과 섬세함 그리고 성취욕을 더하면 경쟁이 가능할 거라고 본다. 승부욕과 실수를 줄이는 것도 중요하겠다. 나는 성남이 할 수 있다고 본다."
-올 시즌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릴 것에 대비해 공약 한 가지를 한다면.
"성남 시내에 4차선 도로를 하루 저녁이라도 막고 팬들과 맥주파티를 하고 싶다. 우승만 한다면 춤이라도 출 수 있다. 염 구단주는 카퍼레이드를 한다고 했다던데 팬들은 자신들이 직접 참여하는 것을 좋아한다."
-올 시즌이 아니어도 꼭 이루고 싶은 목표는.
"탄천종합운동장에 관중을 꽉꽉 채우고 싶다."
-구단주로서의 꿈은.
"암표가 팔리는 게 목표다. 하하.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유럽 인기 구단들은 연간회원권이 시즌 전에 다 팔린다.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암표를 사서라도 경기장을 찾더라. 그것도 아주 비싼 가격에 팔린다. 그만큼 축구를 보려는 팬들이 넘쳐나는 구단을 만들고 싶다는 뜻이다. 내 꿈은 '탄필드'에서도 암표가 팔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