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에서 이대호(34·시애틀)의 위상이 달라졌다. 타석에 들어서는 것만으로 상대 더그아웃과 불펜을 움직인다.
이대호는 12일(한국시간) 미국 시애틀 세이프코필드에서 열린 텍사스와 경기 라인업에서 제외됐다. 전날 메이저리그 데뷔 뒤 첫 연타석 홈런을 터뜨렸지만, 스캇 서비스 시애틀 감독은 좌타자 애럼 린드를 선발 1루수로 출장시켰다. 텍사스 선발이 오른손 콜린 루이스였기 때문이다. 아직 이대호는 플래툰 시스템에 갇혀 있다.
1-1로 맞선 연장 10회말, 더그아웃에서 동료들을 응원하던 이대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시애틀 선두 타자 넬슨 크루스가 텍사스 왼손 투수 제이크 디크먼에게 중전 안타를 때려냈다. 5번 코리 시거가 외야 뜬공으로 물러나자 서비스 감독은 린드의 타석에 '대타 이대호' 카드를 꺼내들었다. 여기까지는 플래툰 시스템에 따른 기용. 이대호가 등장하자 세이프코필드에는 '대호' 응원 콜이 울려퍼졌다. 홈 팬들은 기립박수로 이대호를 맞았다. 그리고 텍사스도 움직였다. 덕 브로카일 투수 코치가 마운드에 올랐다. 디크먼에게서 공을 넘겨받았고, 불펜에선 오른손 강속구 투수 매트 부시가 걸어나왔다.
디크먼은 이 경기 전까지 시즌 평균자책점 1.59를 기록했다. 22⅔이닝 동안 자책점은 고작 4점. 하지만 이 중 2점을 지난 4월 14일 세이프코필드에서 이대호에게 맞은 끝내기 투런 홈런으로 내줬다. 장타 하나로 승부가 끝날 수 있는 연장전, 텍사스 벤치는 디크먼을 믿기 보다, 이대호를 의식하는 결정을 했다.
하지만 이대호는 개의치않았다. 바뀐 투수 부시의 2구째 90마일(145㎞)짜리 슬라이더를 받아쳐 우전 안타를 뽑아냈다. 스트라이크존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공이었지만, 특유의 부드러운 스윙으로 타구를 외야로 보냈다. 텍사스 우익수 노마 마자라는 앞으로 달려들었지만, 노바운드 처리에 실패했다. 텍사스 외야진은 이대호의 장타를 의식해 깊숙한 수비를 펼치고 있었다. 이대호는 후속 스티브 클레빈저의 볼넷으로 2루를 밟았지만, 후속타 불발로 홈을 밟지 못했다.
끝내기 기회를 날린 시애틀은 연장 11회 텍사스 루그네드 오도어에게 솔로 홈런으로 1-2로 패했다. 이대호의 시즌 타율은 0.301에서 0.308(104타수 32안타)로 상승했다. 고액 연봉 선수가 많은 메이저리그 구단은 라인업 구성에 탄력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이대호의 활약은 시애틀 서비스 감독에게 플래툰 시스템을 고수해야 하는지 고민을 안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