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목동야구장. 김재웅의 마지막 공이 포수 미트에 들어가는 순간 덕수고 선수들은 덕아웃에서 뛰쳐나왔다.
최근 5년간 4번째 청룡기 우승. 올해 고교야구 전국대회 2관왕을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덕수고의 마운드 중심에는 2년생 에이스 양창섭(17)이 있었다.
청량중 시절부터 전국구 유망주로 이름을 떨친 양창섭이다. 최고 시속 149km의 빠른공과 슬라이더를 구사하는 우완 정통파 투수다. 180cm·74kg 평범한 체격 조건이지만 위력있는 공을 던진다. '투수 왕국'이라는 덕수고에서 당당한 에이스이자, 지금 고교 2학년 투수 중 넘버 원 유망주다.
덕수고는 올시즌 전관왕에 도전할 전력으로 평가된다. 양창섭 뿐 아니라 김재웅, 박건우, 박세웅 등 쟁쟁한 투수진에 야수진도 빼어나다. 주말리그 전반기 준우승과 후반기 우승, 그리고 황금사자기에 이어 청룡기 우승컵까지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림자도 있다. 2학년 에이스 양창섭은 서울고와의 청룡기 결승까지 올해 무려 60이닝 투구를 했다. 덕수고 선배 김재웅(71⅔이닝)을 비롯해 야탑고 이원준(69⅔이닝), 김해고 김태현(63이닝)이 그보다 많은 이닝을 던졌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3학년이다. 2학년 투수가 올해 1차 지명을 받은 경주고 장지훈(35이닝·삼성), 부산고 윤성빈(37⅓이닝·롯데), 충암고 고우석(36이닝·LG), 장안고 조병욱(32⅔이닝·kt)보다 더 많은 이닝을 던졌다. 2학년 투수 중에선 압도적으로 이닝 1위다.
양창섭의 시즌은 아직 끝나지도 않았다. 앞으로 양창섭이 참가해야 하거나, 참가할 수 있는 대회는 <표1> 과 같다.
올해 양창섭은 팀내 이닝의 28%을 소화했다. 두 번의 전국대회에서 평균 18이닝을 던졌다. 덕수고의 올해 전력으로 볼 때 나머지 대회에서 양창섭은 40이닝 정도를 더해 시즌 100이닝 돌파가 유력하다. 고교 2학년 투수에겐 엄청난 이닝이다. 2학년 유망주 중 강백호(서울고2·30⅔이닝), 박신지(경기고2·15이닝), 안우진(휘문고2·15⅔이닝), 최민준(경남고2·41⅓이닝), 조성훈(청원고2·41이닝) 등과는 큰 차이가 있다. 서울고와 경남고를 제한 팀들은 우승 후보로 꼽힐 전력은 아니다. 강백호는 주력 선발이 아니고 최민준은 손주영과 이승호라는 든든한 선배가 있다. 올해가 지날수록 양창섭과 다른 2학년 투수들과의 이닝 차이는 더 커질 것이다.
2학년 투수의 과도한 투구는 왜 문제가 될까. <표2> 는 최근 6년간 드래프트에서 뽑힌, 고2 때 전국대회(국제대회 제외·주말리그 포함) 70이닝을 넘긴 투수들의 명단이다.
2학년 때 많이 던졌다면, 그만큼 기량이 빼어났다는 의미다. 12명 중 8명이 1차 지명이나 신생팀 우선지명을 받았다. 나머지 4명도 '미래의 에이스'라는 기대와 함께 모두 드래프트 2라운드 내에서 지명됐다. 하지만 12명 중 지금 프로에 안착했다고 볼 투수가 누가 있을까. kt 주권은 2년 차인 올해 첫 완봉승을 따냈지만, 평균자책점은 리그 평균 정도다.
넥센 하영민은 올해 잘 던지고 있지만 지난 두시즌 평균자책점이 7점대였다. NC 구창모는 올해가 데뷔 시즌이며, 한주성(두산)과 이건욱(SK)은 아직 1군 무대를 밟아보지도 못했다. NC의 미래로 기대 받았던 윤형배는 고교 시절 혹사의 여파로 결국 팔꿈치 인대 재건 수술을 받아야 했다. 한화 이태양도 지난해 이 수술을 받아야 했다. kt에서 트레이드로 롯데로 건너온 뒤 에이스급 투구를 가끔 보여주는 박세웅 정도가 안착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2학년 때 50이닝 이상 던졌던 유망주의 실패 사례는 그 외에도 많다. 유창식(KIA·64⅓이닝)은 여전히 제구를 잡지 못하고 있으며, 김택형(넥센·61⅓이닝)의 통산 평균자책점은 여전히 7점대다. 지난해 고교 넘버원 투수 이영하(두산·56⅓이닝)는 입단과 동시에 토미존 수술을 받았다. 한승혁(KIA·55⅔이닝) 역시 3학년 때 18⅓이닝만을 던졌지만, 토미 존 수술을 받았고 김주원(SK·60이닝)은 여지껏 단 한 번도 1군 마운드를 밟지 못했다.
이들은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2011~15년 신인 중 고교 2학년 때 50이닝 이상 던진 투수는 모두 22명이다. 이 중 프로에서 20이닝 이상을 던지고 평균자책점이 최근 3시즌 리그 평균(5.07)보다 좋은 투수는 단 한 명 뿐이다. 332⅔이닝 평균자책점 5.01의 이민호(NC)가 유일하다. 반면 2학년 때 30이닝 이하로 던졌던 한현희(NC·29⅔이닝), 홍건희(KIA·20⅓이닝), 임찬규(LG·16⅔이닝), 조상우(넥센·0이닝), 심창민(삼성·0이닝), 김민우(한화·0이닝) 등이 더 잘 던졌다. 즉, 2학년 때 많이 던진 투수는 프로에서 성장이 더디다.
양창섭은 올해 50이닝의 두 배 가량을 던질 페이스다. 좋은 투수고, 고교야구 토너먼트 대회 특성 상 좋은 팀 소속일수록 더 많이 던져야 한다. '감당해야 할 몫'으로 보기에는 앞 선배들의 궤적이 너무 잔혹하다. 고교야구에서 2학년 때 많이 던졌다고 해서 3학년 때 쉴 수는 없다. 2학년 70이닝 이상 투구 투수 중 3학년 때 40이닝 이하만 던진 투수는 구창모와 심재민 정도다. 두 투수 모두 부상 때문에 이닝 수가 줄었다. 내년에 양창섭과 어깨와 팔꿈치에는 더 큰 부하가 걸릴 전망이다.
한국 고교 투수들은 미국과 일본에 비해 휴식이 적다. 일본 고교야구는 11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4개월간 연습 경기를 금지한다. 미국 고교야구는 메이저리그의 투구 제한 프로그램인 '피치 스마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고교 투수는 겨울에도 끊임없이 공을 던진다. 그 결과 최근 프로야구에선 젊은 에이스가 나타나지 않는다. '프로야구 수준이 올랐기 때문'은 충분한 답이 아니다. 더 수준 높은 일본 프로야구에선 매년 괴물 같은 신인 투수들이 튀어 나온다. 메이저리그에서도 20대 초반의 젊은 투수가 선발진과 불펜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우승기는 대한야구협회와 학교의 역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어깨를 상해 일찍 꽃을 치우지 못한 유망주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프로야구는 최근 수년 동안 기록적인 투고타저다. 어쩌면 예정된 타고투저였다. 프로 구단들은 "몸이 멀쩡한 고교 신인이 없다"고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