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볼티모어는 프랭크 로빈슨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된 후 1루코치였던 자니 오츠가 사령탑에 올랐다. 오츠는 1992년 89승73패(승률 0.549)를 기록하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팀 내 역할이 애매했던 외야수 브래디 앤더슨을 붙박이 1번 타자로 기용한 게 결정적이었다.
앤더슨은 풀타임 1번 타자로 첫 시즌을 보낸 1992년 21홈런, 90타점, 53도루를 기록해 아메리칸리그 MVP 투표(14위)에 이름을 올렸다.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호타 준족이었지만 전형적인 '1번 타자'와 달랐다. 오츠에 이어 1995년 볼티모어 감독이 된 필 리건은 1번 타자로 앤더슨이 아닌 신인 커티스 굿윈을 기용하려고 했다. 굿윈은 1993년 상위 싱글 A와 더블 A에서 두 시즌 연속 '타율 0.280, 50도루'를 성공시킨 유망주였다.
1번 타자로 50홈런을 때려냈던 `거포형 톱타자` 브래디 앤더슨. 리건은 파워 히터 앤더슨이 6번 타순에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1번 타순에서 앤더슨이 만들어 낸 생산성을 보고 뜻을 접었다. 앤더슨은 1995년 143경기에 출전해 108득점을 올렸다. 리건에 이어 1996년부터 볼티모어 사령탑을 맡은 데이비 존슨도 리건과 비슷한 고민을 했지만 타순을 건드리지 않았다. 앤더슨은 1996년 1번 타자로 출전해 50홈런 110타점을 기록했다. 상식을 깬 1번 타자였다.
올 시즌 SK 유니폼을 입은 고메즈는 어떤가. 이 역시 '신개념' 1번 타자다. 김용희 SK 감독은 6월 4일 잠실 두산전부터 고메즈를 1번 타자로 기용해 전환점을 만들었다. 고메즈는 붙박이 1번 타자를 맡기 전까지 36경기에서 타율 0.250, 8홈런, 18타점에 그쳤다. 콘택트 능력에 문제점을 드러냈다. 하지만 1번으로 나선 뒤 37경기에서 타율 0.346, 9홈런, 23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김 감독은 출루율이 0.299로 3할이 되지 않았던 고메즈를 1번 타자로 기용하는 결단을 내렸다. 공격적인 성향 탓에 타석당 투구 수도 3.53개(SK 평균 3.76개)에 불과했다. 타율과 출루율이 낮고, 공을 많이 보는 스타일도 아닌데 1번 타순에 넣은 셈이다. 왜 그랬을까.
김 감독은 "처음 영입을 했을 때부터 1번 타자로 생각했던 선수다"고 말했다. 개막 후 주로 6번과 7번 타순에서 경기를 출장한 고메즈는 적응기를 거친 뒤 1번 타순으로 올라갔다. '1번'은 고메즈가 가장 원하는 타순이기도 하다. 고메즈는 "1번에 기용되면 타격 기회가 많다. 더 많은 공을 볼 수 있다"고 반겼다. 높은 출루율, 끈질긴 투수와 승부가 강조된 전형적인 1번 타자 스타일은 아니지만 본인이 원하는 맞춤식 옷을 입고 타격 성적을 끌어올렸다. 고메즈는 현재 1번 타순에서 홈런 9개 이상을 때려 낸 리그 3명(한화 정근우·두산 박건우)의 타자 중 한 명이다. 1번 타자·타석당 홈런은 1위다. 장타력을 갖춘 톱타자다.
김 감독은 "고메즈는 이중적인 스타일이다. 공격적인데 상황에 따라 참을성도 보인다"고 말했다. 고메즈는 1번에 투입된 뒤 출루율이 1할 가까이 상승, 0.385를 기록 중이다. 김 감독은 "중심타선에 들어가면 선수가 부담을 가질 수 있는데 1번을 치니까 아무래도 그런 부분에선 괜찮을 것"이라며 "1번 타자도 경기 중 후반에는 찬스에 나서고 하기 때문에 타순에 대한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고 말했다.
SK의 '고메즈 1번 타자 기용' 결과는 과연 해피 엔딩일까. 1996년 앤더슨은 '파격적인 1번 타자'라는 평가 속에 볼티모어를 13년 만에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