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리그 넥센의 유격수 강정호는 2014년 겨울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 계약을 했다. 미국 현지에선 의아심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피츠버그에는 그해 12홈런을 때려내며 준수하게 활약한 27세 유격수 조디 머서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정호의 2015년 출장 기회는 제한적일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강정호는 그해 유격수와 3루수 자리에서 115경기를 뛰며 두 포지션에서 모두 합격점을 받았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입증해냈다.
같은 팀의 조쉬 해리슨은 2루수, 3루수, 외야수로도 뛰었고, 션 로드리게스는 여기에 더해 1루수와 유격수로까지 출장했다. 여러 포지션을 맡을 수 있는 다재다능한 선수들이 있었기에 피츠버그는 25인 로스터를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
2016년 시즌 초반 피츠버그는 자유계약선수(FA)로 페드로 알바레스와 닐 워커가 팀을 떠났고, 강정호도 부상으로 출장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공백을 최소화할 수 있었던 건 이런 '유틸리티 플레이어' 덕이었다.
올시즌 내셔널리그 우승을 노리는 시카고 컵스에는 젊고 재능있는 선수들이 넘쳐난다. 중심타선에는 작년 신인왕 크리스 브라이언트가 있다. 브라이언트는 3루수로 주로 출장하지만 외야에서도 준수한 수비를 자랑한다. 작년 3루수로 136경기, 외야수로 10경기 선발출장한 브라이언트는 올시즌은 3루수로 62경기, 외야수로 22경기에 선발출장했다.
외야수 플레잉 타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 덕에 주 포지션이 3루인 하비에르 바에스의 출장 기회가 늘어났다. 바에스는 올시즌 0.800이 넘는 OPS(출루율+장타율), WAR(대체선수대비승리기여) 1.9승으로 팀 호조에 기여하고 있다.
올시즌은 부상 중이지만 포수와 좌익수를 보는 카일 슈워버, 역시 외야 수비가 가능한 신인 포수 윌슨 콘트레라스, 탬파베이 시절 '슈퍼 유틸리티'의 대명사로 불렸던 벤 조브리스트 등 여러 포지션을 뛸 수 있는 선수가 컵스에는 즐비하다. 조 매든 감독은 재능덩어리들을 골고루 출장시킬 수 있는 유동성을 누리고 있다.
이처럼 최근 메이저리그에는 여러 포지션을 훌륭히 소화해낼 수 있는 멀티포지션 선수가 늘어나고 있다. 팬그래프닷컴은 WAR을 포지션 별로 나눠서 제공하고 있다. 올시즌 브라이언트가 3루수로 뛰었을 때 WAR 총합은 2.6, 좌익수로 뛰었을 때는 1.9다. 이 리스트를 이용해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한 경기라도 뛴 포지션의 개수를 모두 더해보았다.
2005년에는 한 경기라도 포수를 본 선수 101명, 1루수 142명 등이 총 1154개의 포지션을 소화했다. 2014년에는 1249개로 집계를 시작한 2002년 이후 역대 최고였다. 지난해에도 1275개로 2년 연속 기록을 경신했다.
각 팀 선수들이 평균적으로 몇 포지션을 소화했는지도 계산 가능하다. '깜짝 출전' 경우를 제외하기 위해 WAR이 0 이상인 포지션만을 대상으로 했다. 2015년과 2016년 현재 기록을 합산하면 컵스가 2위, 피츠버그가 3위였다. 1위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이 팀의 스티븐 피스카티는 1루와 외야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맷 카펜터는 1루, 2루, 3루를 모두 소화할 수 있다.
예전에도 '유틸리티맨'으로 불리는 선수들이 있었다. 대수비 요원이나, 주전 선수의 휴식을 보장하기 위한 비주전 선수들이 해당됐다. 지금 메이저리그에선 팀의 중심타자들도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고 있다는 게 차이다. 피츠버그의 해리슨은 '유틸리티'에서 이제 팀의 핵심 선수가 됐다. LA 다저스의 저스틴 터너도 해리슨과 비견되는 선수다.
올해 볼티모어는 주전 유격수 J.J. 하디의 장기 결장이라는 악재를 만났다. 하지만 팀 간판타자 매니 마차도가 유격수 자리에서 골드글러브급 수비를 뽐내면서 1.8의 WAR를 쌓았다. 원래 포지션인 3루수로도 2.7의 WAR을 기록했다. 마차도 '멀티 활약'은 올시즌 오리올스가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1위 경쟁을 하고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강력한 MVP 후보로도 꼽히고 있다.
긴 시즌을 치르다보면 부상 선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25명으로 제한된 로스터로는 빈 자리를 모두 메우기 쉽지 않다. 이럴 때 운영의 묘를 살릴 수 있게 하는 게 멀티포지션 선수의 역할이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팀에 제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홍기훈(비즈볼프로젝트) MIT와 조지아텍 대학원을 거쳐 스포츠통계업체 트랙맨베이스볼 분석 및 운영 파트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