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자인 보스턴 레드삭스와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트레이드 마감시한 전에 전력을 보강하면서 후반기 더욱 치열한 싸움을 예고했다. 하지만 볼티모어는 이렇다 할 보강을 하지 못했다. 김현수와 함께 좌익수 플래툰으로 활용할 외야수 스티브 피어스와 선발 투수 웨이드 마일리 정도가 전부다. 피어스는 건강이 문제고, 마일리는 FA 실패작인 요바노 가야르도보다 크게 나은 수준이 아니다. 좋은 선수를 끌어모을 만큼의 유망주 자원이 많지 않은 탓이 크다.
현재 볼티모어의 가장 큰 약점은 선발투수진. 선발투수 평균자책점이 10위 아래다. 포스트시즌을 목표로 하는 팀의 성적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크리스 틸먼, 케빈 가우스먼을 제외하고 가야르도, 우발도 히메네스, 타일러 윌슨, 마이크 라이트 등이 전부 평균 이하의 성적이다. 보강이 절실한 상황이지만, 볼티모어는 내부에서 대안을 찾기로 했다. 바로 왕년의 탑 유망주였던 딜란 번디의 선발 복귀이다.
근래의 드래프트 중에서 가장 퀄리티가 좋았다고 평가 받는 2011년에 전체 4번으로 지명된 투수가 번디다. 고졸 선수로 메이저리그 계약을 제시받았을 정도로 대형 유망주였다. 최근 10년 동안 19세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4번째 선수이며, 2013년엔 베이스볼아메리카로부터 전체 2위 유망주(1위 쥬릭슨 프로파, 텍사스 레인저스)로 지명되며 그 가치가 정점에 올랐다. 하지만 이후 잦은 부상이 문제였다. 2016년 발표된 유망주 순위에서 번디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올해 비교적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번디는 메이저리그에서 선발이 아닌 불펜으로 시즌을 시작했다. 4년 만에 빅리그에 돌아온 그는 불펜투수로서 22경기 38이닝 32삼진 12볼넷 3.08ERA을 기록하며 나름 성공적인 활약을 했다. 특히나 시간이 지날수록 구속이 점점 빨라졌다는 게 긍정적이다. 마지막 6차례 14⅓이닝 19삼진 4볼넷 1실점으로 달라진 몸 상태를 확인시켰다.
[번디의 월별 포심 패스트볼 평균 구속 변화] 4월 : 시속 94.3 마일 (151.8 km) 5월 : 시속 94.9 마일 (152.8 km) 6월 : 시속 96.0 마일 (154.5 km) 7월 : 시속 96.6 마일 (155.5 km)
선발투수들이 좀처럼 힘을 쓰지 못하자 볼티모어는 결국 번디의 선발 복귀를 택했다. 시즌 시작 전, 오랜만에 복귀한 그를 무리시키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셈이다. 부상으로 지난 3년 동안 겨우 63⅓이닝을 던진 투수에겐 부담. 어쨌든 볼티모어는 번디의 능력을 믿어보기로 했다.
번디는 이번 시즌 선발투수로서 첫 경기였던 7월 17일 템파베이 전에서 3⅓이닝 4실점으로 부진했다. 포심 패스트볼의 제구가 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이날 던진 43개의 포심 패스트볼 중에서 32개의 공이 높은 코스였다. 이 중 3개가 홈런으로 연결됐다. 불펜 38이닝 동안 피홈런은 겨우 3개였다.
이 날의 부진에도 번디에게 긍정적이었던 부분은 패스트볼의 구속이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 번디는 선발투수로서도 시속 96마일 이상의 패스트볼을 쉽게 던졌다. 긴 이닝은 아니었지만 시즌 중 불펜에서 선발로 보직을 변경할 때 구속 감소가 흔한 일임을 생각한다면 나쁘지 않았다.
불펜 번디의 패스트볼 평균 구속 : 시속 95.35 마일 선발 번디의 패스트볼 평균 구속 : 시속 95.54 마일
번디는 이날 이후 패스트볼의 비중을 낮추는 변화를 줬다. 짧은 이닝을 던지고 적은 수의 타자를 상대하는 불펜에서는 많은 구종을 던질 이유가 없었기에 가장 자신 있는 패스트볼을 주로 던졌다. 하지만 두 번째 선발 경기부터는 체인지업의 비중을 크게 늘리고 그만큼 패스트볼의 비중을 낮췄다. 그리고 타자들의 헛스윙을 유도할 수 있었다. 번디의 체인지업은 헛스윙률 23.8%짜리 공이다.
선발 전환 후 번디의 구종 변화 포심 패스트볼 : 64.1% → 58.8% 커브 : 19.1% → 17.4% 체인지업 : 16.7% → 23.7%
약간의 변화를 준 이후, 번디는 선발 4경기에서 23⅔이닝 29삼진 3볼넷 평균자책점 1.90으로 반등했다. 번디가 선발투수로서 성공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 만으로 볼티모어에겐 큰 의미가 된다. 특히나 최근 텍사스의 강타선을 상대로 보여준 7이닝 1피안타 1볼넷 7삼진 활약은 볼티모어가 그토록 기대했던 에이스의 피칭이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커브다. 유망주 시절 포심 패스트볼과 더불어 번디의 최고 무기가 될 것으로 보였던 커브는 2016시즌에 들어서야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시즌 중반이 훌쩍 지난 이 시점까지 커브를 던져 허용한 장타는 가장 최근 경기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강타자 호세 어브레유에게 허용한 2루타 단 한 개이다. 번디는 대부분의 커브를 큰 낙차를 이용해 좌타자 기준 몸쪽 낮은 곳으로 정확히 떨어뜨리고 있는데, 이는 장타를 억제하는데 매우 큰 힘이 되고 있다.
선발 투수로 좋은 활약을 하기 위해선 충분한 구위와 여러 타자들을 상대할 수 있을 만한 평균 이상의 변화구를 2개 이상 보유해야 한다. 번디는 이 조건들을 갖췄다. 긴 시간동안 괴롭혔던 부상에서 자유로워질 수만 있다면, 유망주 시절에 극찬 받았던 피칭을 기대해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아직 넘어야 할 산은 많다. 건강 문제는 늘 주의해야 한다. 또 8월 2일 등판에서 처음으로 7이닝을 이상을 던진 번디는 7회에 구속이 급격히 떨어졌다. 오랜만에 긴 이닝을 던진 번디에게 경기 후반 체력적인 부담은 분명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지구 1위 다툼이 한창인 구단이 3년 동안 60이닝을 조금 넘게 던진 23세 투수에게 선발 로테이션의 한 자리를 맡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볼티모어의 도전은 그래서 아직은 도박에 가깝다. 하지만 '올인'은 하지 않는다. 볼티모어는 번디의 투구수를 약 90개로 제한하고 있다. 선발 전환 후 번디가 던진 공의 개수는 각각 70개, 87개, 89개, 88개, 92개였다. 볼티모어가 번디를 무리시키지 않음을 보여준다.
봉상훈(비즈볼프로젝트) : 지속적인 스포츠 콘텐트 생산을 목표로 하는 젊은 스포츠 연구자들의 모임. 일간스포츠와는 2014년부터 협력 관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