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엔 한국영화를 나누는 새로운 기준이 생겼다. '이경영이 출연한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로 나뉜다. 그의 출연작을 열거하다보면 숨이 가쁘다. 지난해 부터 약 1년 간 출연한 영화만 '소수의견'·'협녀, 칼의 기억'·'암살'·'뷰티 인사이드'·'치외법권'·'서부전선'·'내부자들'·조선마술사'·'대배우' 등 9편. 앞으로 개봉할 영화는 '리얼'·'·재심'·'더 프리즌'·'메이드 인 코리아'·'태권소녀 뽀미'·'군함도' 등 6편이다. 몇 년간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한 이경영(56)은 달콤한 결실도 맺었다. 두 달 전, 영화 '소수의견'으로 '제52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부문 남자 조연상을 수상했다.
당시 시상자로 나선 유해진은 "여러분들이 배우를 배우라고 불러주시는 이유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배우라는 뜻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기대에 걸맞는 분께 상이 돌아간 것 같습니다"며 수상자로 이경영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경영은 이날 건강 상의 이유로 불참해 유해진이 주는 상을 직접 받진 못 했다. 건강을 회복한 뒤 뒤늦게 트로피를 건네받은 이경영은 취중토크 인터뷰를 통해 수상 소감을 전하며, 축하주를 마셨다.
수상 후기를 듣기 위해 그를 만난 곳은 '이경영 단골집'으로 유명한 경기도 일산의 한 족발집이었다. 족발집 벽엔 그와 함께 작품에 출연했던 조진웅·이정재 등 수많은 스타들의 방문 흔적으로 가득했다. 이경영이 많은 선후배들과 함께 술 한잔을 기울이며 연기에 대한 고민을 주고 받는 장소다.
▶뒤늦게 전하는 '백상예술대상' 수상 소감
-취중토크 공식 질문입니다. 주량은 어떻게 되나요. "대중 없어요. 예전에 비해선 확실히 줄었죠. 30대 때까지는 무한질주했죠. 밤새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촬영장에 가도 괜찮았어요. 40대 땐 술을 마시는 게 좀 줄기 시작했고, 50대가 되면서 체력이 안 따라주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술을 마시면 다음 날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못 할 정도로 체력이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촬영 전 날엔 술을 무리해서 마시지 않아요. 예전에는 소주 두 병은 그냥 마셨는데 요즘엔 와인을 더 선호해요. 홍초타서 마시는 소주도 좋아하고요."
-자주 만나는 술 친구는 누구인가요. "작품할 때는 그때 촬영 함께하는 팀과 주로 마셔요. 오랫동안 꾸준히 가장 오래 함께한 친구는 김민종이죠. 민종이는 힘들 때 제일 큰 힘이 되는 존재였고, 늘 한곁 같은 모습으로 제 옆에 있는 고맙고 든든한 존재죠. 민종이나 가족, 친한 지인들이 늘 저를 똑같은 모습으로 봐주시고, 옆에 있어주는 걸 볼 때마다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오늘 취중토크 장소를 직접 선정하셨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자주 오는 곳이에요. 제가 하도 족발 얘기를 많이 해서 연관검색어에 족발이 있던데 사실 지분은 없어요. 하하하. 작품을 할 때 회식 장소로 자주 오죠. 제가 추천해서 선후배 배우들, 감독들, 제작자들이 많이 다녀갔어요. '협녀, 칼의 기억'을 찍을 때 (전) 도연이랑 서로 자신이 가는 족발집이 더 맛있다는 얘기를 했는데 도연이가 추천한 곳과 제가 추천한 이곳을 다 가서 먹어본 김병서 촬영감독님이 제 편을 들어줬죠."
-'백상예술대상' 얘기 좀 해볼게요. 당시 10명의 남녀 조연상 후보 중 유일하게 불참했어요. "지독한 감기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영화 '리얼' 촬영을 하면서 다른 영화 캐릭터 때문에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거든요. 몸이 피곤한 상태에서 무리를 하다보니 독감에 걸렸어요. 백상예술대상 바로 전 날 밤에 응급실에 가서 링거를 맞았는데 몸이 좋아지지 않아서 도저히 시상식 당일에 못 가겠더라고요. 저만 불참했는데 제가 상을 받아서 다른 후보들에게 미안했고, 또 한 편으로는 깜짝 놀랐어요. 정말 수상을 상상하지도 못 했거든요."
-당시 시상자였던 유해진씨에겐 따로 연락이 없었나요. "바로 연락이 왔죠. 제일 먼저 전화가 왔어요. '형 어디 아프세요?'라며 걱정하는데 뭔가 고맙고 서글프더라고요. 아파도 갈 걸 그랬나봐요. 해진이와 인연은 오래됐어요. 또 제가 상을 받은 '소수의견'도 함께 했죠. 그렇기 때문에 해진이가 준 상을 현장에서 받았다면 더 행복했을 것 같아요. 제가 못 가서 죄송하죠. 해진이는 참 신비로운 배우예요. 생김새도 신비로운데 심성은 더 신비롭죠. 해진이의 매력에 빠지면 헤어나오기 쉽지 않아요. 해진이랑 술을 마시면서 수다를 떨면 제가 한 뼘 더 자라게 돼요. 삶을 바라보는 태도나 연기와 작품에 임하는 자세 등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면서 해진이 한테 많이 배우죠. 진지할 땐 진지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굉장히 유머러스한 친구예요."
-대리수상한 분이 건강 상의 이유로 불참했다고 말해서 건강을 걱정하는 문자와 축하 인사를 동시에 받았을 것 같아요. "그 날 백상예술대상에 있었던 김혜수·전도연·조진웅·변요한 등 많은 배우들에게 바로 문자가 왔어요. 특히 진웅이 문자는 많이 뭉클했죠. 진웅이랑 같이 조연상 후보에 올랐는데 제가 받은거잖아요. 근데 진웅이가 지난 번 청룡영화상 때 저랑 같이 후보에 올랐는데 본인이 받아서 미안했나봐요. 그걸 이제서야 털어냈다고 그러더라고요. 진웅이가 '지난 번 제가 너무 송구했으나 이제 맘이 편해옵니다. 아프세요? 그러지 마세요. 형님 오늘 수상 진짜로 축하드리고 제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파이팅'이라고 문자를 보냈어요. 고맙다고 답신을 보냈더니 '아프지마. 동생으로 명령입니다. 제발'이라고 또 문자가 왔더라고요. 진웅이 진짜 멋있는 친구죠?(웃음)"
-그 날 못 했던 수상 소감을 들어보고 싶네요. "'누군가와 같은 시대를 함께 한다는 것은 단 한 번 뿐인 삶이기에 더욱 귀중합니다. '소수의견'은 다수가 보았더라면 더 의미가 있었을 작품이란 생각을 합니다. 소수가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며, 아니 아예 소수와 다수의 구분이 없는 꿈동산 같은 사회를 꿈꾸며. 축하인사에 감사드립니다'라고 하고싶네요.(웃음) 영화 '소수의견'은 관객 동원에서 좀 아쉬운 성적을 거뒀지만, 그렇게 외면당할 영화가 아니에요. 흥행에 성공하진 않았지만, 큰 메시지를 담은 영화죠. 제가 출연한 여러 작품 중 '소수의견'으로 상을 받아서 더 좋아요. 이번 상은 '소수의견' 팀에게 주는 선물이자 그들의 용기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해요."
-방송으로 생중계된 시상식에서 수상한 건 오랜만이죠. "그렇네요. 전 사실 상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상을 받지 않고 어떻게든 도망다니고 싶어요. 상의 권위를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을 받는 게 쑥스럽고 부끄럽기도 하고, 상의 가치를 넘어서 제 스스로 착각에 빠져 현혹될 것 같아서예요. 그래서 저는 한 번도 트로피를 제 눈높이 보다 높은 곳에 올려둔 적이 없어요. 높은 곳만 향해서 달려갈 수도 없고, 그게 목표인 것도 원하지 않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