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이고,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소유할 수 있을까. 깨달음을 소유할 수는 없다. 깨달음을 소유하는 순간 자칫 교만이 싹튼다. 진리도 깨달음처럼 발견은 해도 소유하지는 못한다. 설령 소유했다고 해서 소유가 되는 것도 아니다. 깨달음은 깨었다는 것일 뿐,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강요하는 순간 깨달음은 사라진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법도가 있다. 가장 낮은 범부의 생활을 할 수 있어야 깨달은 사람이요, 진리를 터득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초인적인 삶을 산다든지, 남들이 비범한 사람처럼 보고, 비범한 사람이라 소문이 난 사람은 결코 비범하지도, 깨달은 사람도 아니다.
영혼도 깨달을 수는 있지만 소유할 수는 없다. 영능력자로서 영혼의 세계를 알려줄 수는 있지만 영혼에 대한 깨달음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다. 사람마다 영혼을 갖고 있으며 영혼은 저마다 삶의 궤적도, 취향도, 소원도 다를 수밖에 없다.
지난 추석에도 차례를 두고 말들이 많았을 것이다. 어른들이 나서서 차례 상의 법도를 잘 지켜야 한다고 일장연설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가들의 입장은 다르다. 영가마다 자신이 받고 싶어 하는 차례 상은 따로 있다.
담배를 좋아했던 영가는 담배 한 대만 피웠으면 하고 술을 사랑했던 영가는 큰 술잔 가득 술을 받고 싶어 한다. 젊은 나이에 일찍 떠난 영가의 경우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피자와 치킨, 햄버거일 것이다. 이들에게는 차례주보다는 시원한 콜라나 좋아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커피를 원하는 영가들도 있다.
영가도 한 때는 사람이었다. 비록 이 세상 사람이 아니더라도 먹고 싶었던 음식, 갖고 싶었던 물건을 원하는 습관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렇다면 영가를 위한 차례상을 준비하는 것은 어떨까. 와인을 좋아했다면 와인을, 막걸리를 좋아했다면 막걸리를 곁들여 올리는 것이 진정한 차례상이 아닐까 한다.
얼마 전, 후암 가족에게 있었던 일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 건강이 나빠져 차례와 제사를 모 사찰에 맡긴 가족이 있었다. 그렇게 2년이 흘렀을까. 어느 날 아버지 영가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내 꿈에 나타났다. 영가는 생전 고기를 좋아하는데 사찰에서 차례를 지낸 뒤 고기를 못 먹었다면서 자식들에게 잘 타일러 차례와 제사를 집에서 지내게 하고 고기와 술을 잊지 않고 상에 올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깨달은 사람의 차례 상은 달라야 한다. 전통도 중요하지만 다소 법도에 어긋날 지라도 영가를 위하는 마음이 우선이라는 것을 안다면 원하는 음식을 곁들여 올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법도와 전통이 요구하는 차례 상이 아닌, 영가가 원하는 차례 상을 올리는 사람이야말로 깨달은 사람이요, 진리가 무엇인지 발견한 사람일 것이다.
우리는 정성을 다한다고 하면서도 과연 영가를 위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일 때가 있다. 진리라는 것에 얽매여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깨달음은 마음이 깨는 것이니 진정 영가가 원하는 차례 상이 무엇일지 한번쯤 생각해보면 좋겠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