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구하기 위해 13명과 싸우다 왼쪽 눈을 실명했다'는 오래된 무용담으로 인사를 대신한 그는 단숨에 500ml 생수병을 비워 냈다. 병을 내려놓은 그는 "남자라면 한 번 시작한 스파링은 끝까지 해야죠. 의리가 있으니까요"라며 다시 링에 올랐다.
지난 11일 서울 청담동의 한 체육관에서 만난 배우 김보성(50). 20~30대 현역 격투기 선수들을 상대로 글러브를 낀 그는 스파링을 하던 20분 동안 세 차례 다운을 내줬다. 그럴 때마다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몸이 덜 풀렸다고 했다.
"컨디션이 좋은 날엔 젊은 친구들도 밀릴 만큼 날카로운 펀치가 꽂히는데 하필 오늘 인터뷰를 하네요."
스파링을 끝내고 마주 앉은 김보성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짧게 깎은 머리에선 땀방울이 멈추지 않았다. 왼쪽 눈두덩이엔 푸르스름한 멍도 보였다.
'액션 배우'의 대명사 김보성이 격투기선수로 데뷔한다. 그는 국내 종합격투기 단체 로드 FC가 오는 12월 10일 장충체육관에서 개최하는 대회에서 유도선수 출신 콘도 데츠오(48·일본)와 맞붙는다. 파이트 머니(대전료) 전액을 소아암 환자들을 위해 기부하기로 했다. 로드 FC도 입장권 수익을 모두 내놓는다. 최근 수개월째 길러 온 머리카락을 자른 것도 소아암 아이들을 위해 머리카락을 기부하기 때문이다.
김보성은 "왼쪽 눈 때문에 시각장애인으로 등록돼 있는데 오른쪽도 시력이 좋은 편이 아니다. 시합 때는 렌즈를 끼고 링에 올라야 한다" 면서도 "소아암 환자 아이들이 수술비가 없어 생명을 잃는 것을 지켜보면 눈물이 난다. 내가 맞고 쓰러져 죽는다 해도 아이들을 도울 수만 있다면 끝까지 할 것"이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의리' 를 크게 한 번 외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김보성은 연예계 데뷔 후 27년째 줄곧 '의리' 를 외치고 있다. 큰 인기를 얻은 건 2014년 한 식혜 광고에 출연해 뜬금없고, 맥락 없는 " 으리(의리)!"를 외치면서부터다.
김보성은 연예계의 소문난 기부왕이다. 그는 최근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남자 마라톤 은메달리스트 이봉주(46)와 함께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광고 영상을 촬영했다. 물론 출연료는 받지 않았다. 사회 약자들을 돕는 일이라면 시각장애인 단체, 자선 축구, 자선 마라톤 등 행사와 단체를 가리지 않고 달려간다. 현재 그가 홍보 대사를 맡은 자선·사회복지 단체는 무려 20여 개다.
"어려웠던 시절 이웃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배우로 자리 잡은 뒤엔 저도 약자를 위해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죠."
김보성은 아들 둘(중3·중1)을 둔 가장이다. 격투기 출전 소식에 아내는 "다른 건 다해도 격투기만은 안 된다. 이혼 도장부터 찍어야 할 것"이라며 강수를 뒀다. 그런 아내 앞에서 김보성은 두 번이나 무릎을 꿇고 빈 후에야 허락을 받아 냈다. 그는 "남을 도와도 가족을 굶긴 적은 없다. 내 모습을 보고 아이들도 어려운 사람들을 챙겨 기분이 좋다" 며 "가족에겐 아낌없이 투자하지만 내 물건은 아예 안 사고, 옷도 협찬받은 것만 입는다" 며 껄껄 웃었다.
평생 맞을 펀치를 지난 몇 달 사이 다 맞고 있다는 그는 "평소 남자다운 이미지도 있고, 같이 운동하는 선수들이 다 동생들이기 때문에 아파도 아픈 티를 못 낸다" 면서 "이번 도전을 통해 소아암 환자는 물론이고 나 같은 50세 가장들에게도 희망을 주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체육관을 나서던 순간, 김보성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 사실 로드 FC와 3경기 계약했습니다. 다음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기부 경기에 나서려고요. 물론 아내는 이 사실을 모릅니다(웃음). 링에서 죽으나 집에서 죽으나 마찬가지잖아요. 으으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