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의 기다림 끝에 원전사고를 소재로 한 영화 '판도라'를 드디어 세상 밖에 내 놓게 된 박정우(48) 감독이다. "좋은 세상, 편한 세상에 영화를 개봉하고 싶다"는 희망은 무산됐고, 최악의 시국 뚜껑을 열게 돼 아쉬운 것도 사실이지만 4년이면 만족한다. 이젠 영화도, 두려움도, 불안함도 훌훌 털어버릴 때가 됐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는 좋지만 자칫 영화의 모든 상황을 시국과 연결지어 생각하실까봐 걱정됩니다" 정부저격 스토리는 관객들의 공감대를 높이는데 큰 효과를 발휘하겠지만 '판도라'의 소재는 결국 원전이다. 박정우 감독은 "지금 이 순간도 원전은 낡아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4년 만의 개봉이다.
"반응을 띄엄띄엄 챙겨보고 있는데 '망작' 평가는 받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다. 4년 동안 한 작품에 매달렸다고 해도 걸린 시간과 완성도는 별로 상관이 없다. 보통 영화판이나 사람들 심성이 큰 영화를 한다고 하면 어느정도 기대와 예상을 하지 않나. 그래서 조금 더 예민하게 '얼마나 잘 만들었나 보자'라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만족시킬 수 있을까' 부담됐다."
- 어떤 부분을 가장 신경썼나.
"재난 영화라고 하면 '스토리가 뻔하고 전형적인 기승전결 구도를 갖고 간다'는 인식이 강하다. 처음부터 각오했고 엄청 고민했던 지점이다. '좀 더 신선한, 다르게 보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연구했지만 큰 자본이 들어가는 영화에 나 혼자만의 영화가 아니지 않나. 실험적인 도전과 모험은 개인적으로 신나고 좋지만 배우·스태프·투자자들에게는 미안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되도로이면 이전 재난 영화들과는 차별성 있어 보이게 가되, 안전성도 지키려 했다."
- 안전성의 기준이 있을까.
"나름 논리적인 합리성을 찾는 것이다. 인물들의 감정을 억지스럽지 않게 건드리고 최대한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뻔하지 않은 눈물코드를 노리기 보다는 '전체적으로 차원다른 슬픔을 한 번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남의 슬픔, 캐릭터의 삶이 아니라 내 일처럼 느껴지게끔 만들고 싶었다. 사실 구조적인 면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지만 너무 신파적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 자신한다."
- 시선적으로, 감정적으로 강도가 센 작품이다.
"감독에게는 시나리오가 설계도다. 특히 난 글도 쓰고 연출도 하는 감독이다 보니까 기본적인 설계 그림을 그려놓고 촬영·미술·조명 등 각 전문가들에게 '이렇게 해달라' 제안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온 아이디어를 첨부해서 풍성한 그림들이 작품 안에 들어오게 만든다. 이번 영화는 매 신마다 많은 공력을 들였다. 대부분 엔딩이나 클라이막스에 가장 큰 힘을 쏟는데 '판도라'는 지진발생 10분 이후부터 같은 세기로 그려져야 한다 생각했다. 스태프들이 죽어났다."
- '연가시'도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감독의 성향인가.
"'판도라'는 '연가시' 때 보다는 나름 호흡도 주고 쉬어가는 코너도 넣었다. '연가시'는 관객들을 숨도 못쉬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웃음) 물론 내 기준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판도라'를 보면서도 숨가파 할 수 있다." - 걱정했던 CG에 대해서는 호평이 많다.
"천만다행이다. 이 영화는 현장에서 직접 찍은 것 같은 생생한 현실감을 선사해야 목표와 몰적이 완성된다. 치밀하게 조사해 실제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세트장을 100% 구축할 수 없기 때문에 CG에 많이 의지해야 했다. 워낙 양이 많아 시간이 오래 걸릴 수 밖에 없었지만 생각했던 것 보다 속도가 너무 늦었다. CG가 나와야 편집 방향도 잡는데 그게 안 되니까 답답하더라. 어느 순간 내가 지쳤다. 기대했던 목표치가 있는데 지친 마음에 '이 정도면 됐어'라고 넘겨버릴 것 같았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때부터 CG팀을 쪼았다. '이게 우뢰매지 CG냐. 영화 그냥 엎어버린다'는 식으로 괴롭혔다. 스태프들도 나도 잠 못자면서 결국 완성해 냈다. 여전히 미흡한 부분은 있고 100% 만족하지는 못하지만 대중적으로 무난하게 나온 것 같다."
- 예고편보다 본편 CG가 더 좋아진 느낌이다. 피드백이 있었나.
"끝물에 '이 정도면 됐다'고 또 한 번 말할 뻔한 순간이 있었다. 그 때 배급사 측에서 예고편에 주요 CG를 넣겠다고 하더라. 완벽하게 완성됐던 상황이 아니라 절대로 쓰지 말라고 했는데 썼더라. 이게 영화의 흐름을 타면서 보면 괜찮아 보이는 것도 순간적으로 나오면 퀄리티가 티난다. 예고편이 공개된 후에 CG를 욕하는 댓글이 엄청 달렸다. 속상했지만 기회라 생각하고 CG팀에게 또 달려가 '댓글 봤냐. 이런 식이면 이 영화 끝나고 너희 회사는 문 닫는다'고 몰아쳤다. 마지막 비상이었다. 모든 사람이 달라붙어 업그레이드 하고 또 업그레이드 했다."
- 악독한 감독이라는 소문이 자자했겠다.
"스태프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미안한 순간이 너무 많았다. '방법이 그것 밖에 없었냐'고 묻는다면 그 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보답하는 길은 역시 흥행 아닐까."
- '부산행' 좀비 뺨치는 보조 출연자들도 눈에 띄었다.
"'연가시'를 찍으면서 큰 화면과 작은 화면의 조화로운 배치에 대한 노하우가 생겼다. 어떻게 건드리면 어떤 효과를 낼 수 있는지 알게 됐다. 지방 촬영을 할 때는 현지 동원 인구가 한정적이다. 200~300명 되는 보조 출연자들로 그 장면들을 모두 만들어냈다. 선으로 구획을 다 나눠서 오전 9시부터 해질 때까지 촬영했다. 옷 갈아 입히면서 뛰고 또 뛰게 했다. 다 끝나니까 '만세'를 외치고 현장을 떠나더라. CG의 도움도 빌렸지만 부산역·공항·기차플랫폼·선착장 모두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신이다."
- 다만 대사가 잘 안 들린다는 지적이 있는데.
"욕심을 부렸다. 파이널 믹싱을 할 때 사운드 팀은 사운드 담당자로서 책임의식을 갖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리는 소리까지 꼼꼼하게 체크했다. 주요 메인 배우들이 주고 받는 대사도 중요하지만 아비규환 속 작은 소음들도 빠지면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 또 배우들 대부분이 격양된 상태로 연기를 해야 했고 대사 자체도 어려웠다. 고증에 의해 만든 대사들이다. 관객 분들 입장에서는 화면에 사운드, 빠른 속도까지 한꺼번에 들어오는 정보가 많아 힘겨울 수 있다. 나름 수위를 조절해 견디기 힘들 정도가 아닌 상태로 맞춘 것이다. 무엇보다 현장 한 복판에 같이 있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 러닝타임이 다소 길다는 이야기도 있다.
"본편은 정확하게 2시간 8분이 안 된다. 참여한 인원이 원체 많다보니 자막이 다른 영화보다 길어졌다. 사실 심의를 넣을 때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넣어야 하니까 '아마 이 정도는 나올 것이다'는 수치를 산정해 놓고 넣는다. 러닝타임 등을 변경할 수 있다고 해서 충분히 붙였는데 나중에 변경이 안 된다고 하더라. 그래서 2시간 16분으로 조금 길어졌다. 오히려 러닝타임을 알고 영화를 보면 더 짧게 느껴지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다."
-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맞출 수도, 또 모든 관객들을 설득시킬 수도 없는 것 같다.
"맞다.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는 극장마다 영사기 수준이 다르다. 언론배급시사회나 VIP시사회는 상영을 하기 전에 담당자들이 극장 상황을 완벽하게 맞춰놨다. 소리가 크면 내리고, 화면이 어두우면 밝혔다. 하지만 개봉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내가 만든 작품의 퀄리티를 100%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안 되겠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 공력이 더 쌓이고 인생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할 수 있게 되면 여백의 미 넘치는 영화를 만들게 되는 날도 오지 않을까. 그 전까지는 몰아 부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