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불행 그리고 희망의 '판도라' 상자가 4년 기다림 끝에 드디어 열린다. 무능한 대통령이 등장하고 폭발 사고에도 아무런 대책조차 세우지 못하는 정부를 저격한 스토리는 어지러운 시국과 맞물려 관객들의 주목도를 높이고 있다.
제작비만 무려 150억. 어마어마한 대작을 이끈 김남길(35)은 극중 소시민 영웅으로 원전폭발 사고 피해자를 연기했다. "눈에 띄는 외압은 없었지만 개봉이 미뤄지면서 조바심이 났고 불안하기도 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한 김남길은 "배우로서 아쉬운 점은 많지만 선택에 후회는 없다"고 단언했다.
스타성 강한 어린 후배들과 잘나가는 선배들 사이에 딱 끼어있는 나이. "앞으로의 몇 년이 '배우 김남길'을 결정짓는데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될 것 같다"는 그의 말처럼 한 작품 한 작품을 예민하게 골라야 하는 상황에서 선택한 '판도라'는 김남길에게 새로운 꽃길을 열어주지 않을까.
"시국으로 물타기 하기는 싫다"고 강단있게 말하는 김남길은 김남길의 인생 캐릭터 '선덕여왕'의 비담보다 확고한 눈빛을 띄었다. 경험이 내공으로. 보지못한 새 한층 성장하고 더 깊어진 김남길이다.
※인터뷰 ③에서 이어집니다
- 찍어놓은 세 편의 영화가 모두 개봉이 밀리면서 뜻하지 않은 공백기를 갖게 됐다.
"난 뒤에서 열심히 찍고 있는데 당장 드라마나 CF를 통해 TV에 나오지 않으니까 주변 분들은 배우 활동을 그만 둔 줄 알았다고 하시더라. 아버지 지인 분들은 '이젠 연기 안 한대?'라고 물어 보셨다고 하고, 내가 최근 시민단체 대표로 인터뷰를 했는데 '아, 연기 안하고 이제 이런 일 하는구나'라고 알고 계신 분들도 있다고 한다.(웃음)"
- 조바심은 없었나.
"초반에는 있었다. '뭐지? 자꾸 왜 이러지?' 싶더라. 근데 내가 진짜 일을 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직업적으로 할 일은 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결과물을 갖고 만나면 된다'는 마음으로 버텼다. 예전보다는 확실히 많이 편해졌다. 흥행도 잘되고 안 되고를 떠나 어떤 작품을 하느냐에 중점을 두게 된 것 같다."
- 결국 배우는 연기로 보여줘야 하는 직업이니까.
"배우가 할 수 있는 롤이 있고 그것을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나이대 배우의 쓰임새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다. 선배님들은 선배님들의 롤이 있고, 젊은 친구들은 스타성을 갖고 앞으로 나아갈 것 아니냐. 그 안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향후 몇 년의 활동이 배우 김남길을 결정짓는데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될 것 같다."
- 드라마에서는 언제쯤 볼 수 있을까.
"워낙 날고기는 젊은 친구들이 많아서. 난 어느 순간 아재 쪽으로 기울다 보니까 내가 생각이 없는게 아니라 제의가 없다. 진짜다.(웃음)"
- 쇼케이스 때 보니까 어린 팬들이 많던데.
"나도 놀랐다. 그 날 내가 좀 많이 당황했는데 그 정도로 당황한 이유가 있다. 오래 전부터 만났던 팬들이 있고 그들과 같이 나이 들어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어린 친구들이 소리를 지르니까 '나에게도 아직까지?'라는 생각이 들더라.(웃음) 팬서비스로 백허그를 할 때 배경음악을 깔아줬는데 꼭 드라마를 찍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이런 마음을 가져도 되나' 싶었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 끌리는 장르나 스토리가 없는 것은 아닌가.
"솔직히 영화보다 두려운 장르인건 맞다. 직접적으로 바로 피드백이 오니까. 진중한 이야기를 하기도 애매하고. 물론 좋은 대본, 시놉시스가 있으면 달려들어 하고 싶은데 결정적으로는 체력도 문제다."
- 벌써?
"무대인사를 밤 10시, 11시 쯤에 마치고 집에 들어갔다가 인터뷰 일정 때문에 새벽같이 다시 나와야 하는 스케줄이었다. 그것조차 너무 힘들더라. 나도 깜짝 놀랐다. '어릴 때는 대체 어떻게 했대?' 싶을 정도였다. 최근 도연이 누나와 연락할 일이 있었는데 '누나 드라마 안 힘드셨어요?'라고 여쭤봤더니 '나 원래 탤런트였어~'라면서 '힘들긴 했는데 그 만큼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두 번 하라면 못 할 것 같기는 하다'고 답해 주시더라. 선배님들은 선배님들대로 너무 잘하고 계시니까 나만 잘하면 된다 싶은데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 비담 캐릭터 같은 강렬한 인물을 다시 보고 싶어하는 분들도 많다.
"내가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사극에서는 전무후무한 캐릭터가 아닌가 싶다. 내 배우 인생에 있어서도 그렇고. 두 번 다시 못 만날 캐릭터라 생각한다. '선덕여왕' 감독님, 작가님과는 여전히 연락하고 지내고 시사회에도 늘 초대하는데 우리끼리도 그런 이야기를 한다. 무엇보다 비담을 한 번 해봐서 그런지 어떤 사극을 봐도 비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10년이 지나면 깨지려나?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인물 자체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가.
"정서적으로 여운이 많이 남는 배우. 내가 출연한 영화, 내가 연기한 캐릭터를 보고 여운이 남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많은 감정들을 표현할 줄 아는 배우가 되고 싶다. 어렸을 때는 단편적으로 나쁜남자, 사연을 가족 있는 이미지를 부각시키려 일부러 노력한 부분도 있다. 이 배우를 떠올렸을 때 명확하게 돋보이는 확고한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다. 양조위, 장첸이 롤모델이었다. 그들의 작품을 보다 보니 그런 쪽으로 이미지가 잡혀 가더라. 위험할 수 있지만 일단 이미지를 구축하고 한 쪽의 이미지가 각인되면 또 다른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여전히 그 마음에 큰 변화는 없다."
- 배우는 내가 아닌 캐릭터로 나를 보여줄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맞다. 내 실제성격을 떠나 싱크로율이 얼마나 맞냐 안 맞냐가 중요한 것 같다. '해적' 때 주변 분들은 '딱 너다'라고 했지만 관객들은 '김남길한테 저런 부분도 있었어?'라며 놀라워 했다. 당연히 '좀 어색한데'라는 반응도 있었다. 이번 '판도라'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그 다름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