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3년 연속 개인 통산 3번째 황금장갑의 주인공이 됐다.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포수 계보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전까지 3회 이상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포수는 6명에 불과하다. 그들은 좋은 포수였고 뛰어난 타자였다. 팀을 우승, 포스트시즌으로 이끈 리더였다. 무엇보다 투수에게 믿음을 주는 파트너였다. 그들과 배터리를 이룬 명투수들로부터 '파트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만수(58) 전 SK 감독은 계보의 시작점이다. 그의 손끝에서 한국 야구가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2년 3월 27일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에서 최초의 홈런과 안타를 기록했다. 100홈런, 200홈런 고지도 선착했다. 프로 출범 이후 5시즌 동안 3번이나 홈런왕에 올랐다. 1984년엔 홈런(23개)-타점(80타점)-최다안타(102개)를 기록하며 한국 야구 사상 최초로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했다. 실력과 더불어 유쾌한 퍼포먼스까지 사랑받으며 초기 프로야구의 인기를 이끌었다.
안방에서의 능력은 타격 능력에 비해 다소 가려졌다. 골든글러브는 수비율로 뽑은 1982년을 제외하곤 줄곧 포지션 '베스트 플레이어'를 뽑는 상이었다. 때문에 타격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이만수의 타격이 워낙 뛰어났기에 수비 능력은 평가절하됐다.
하지만 이만수는 블로킹과 도루 저지 능력이 뛰어난 포수였다. 그는 포수로 나선 901경기에서 도루 저지율 0.380를 기록했다. 역대 5위 기록이다. 투수와 호흡도 잘 맞았다. 당대 최고 투수 중 한 명이던 김시진 현 WBC 국가대표 전력분석팀장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이만수와 배터리를 이뤘다. 프로에선 김시진이 입단한 1983년부터 6시즌 동안 호흡을 같이했다. 1985년과 1987년엔 나란히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김 팀장은 "이만수의 포수 능력이 공격력에 가려졌다는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포구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당시 프로야구에도 '사인 훔치기' 논란이 있었다. 때로는 사인 없이 투구를 한 적도 있다. 그때 나는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고 돌아봤다.
다음 계보는 장채근(52) 홍익대 감독이 잇는다. 그는 1988년 이만수의 6년 연속 골든글러브 수상을 저지했다. 그해 팀 동료 김성한과 홈런왕을 두고 접전을 펼친 끝에 2위에 올랐다. 해태의 한국시리즈 우승도 이끌었다.
그는 특히 투수 리드 능력이 뛰어났다. 투수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해 줬다. 투수에 따른 차별도 하지 않았다. 천하의 에이스 선동열은 물론 신인 이대진과도 볼 배합을 의논하고 상대 의견을 존중했다. 1989년부터 6시즌 동안 호흡을 맞춘 이강철 두산 코치는 장 감독에 대해 "모든 면에서 고루 뛰어난 포수였다. 포구와 블로킹은 물론 볼 배합 능력도 뛰어났다. 상대 타자들을 분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운드에 오르면 그의 사인대로 던지면 됐다. 듬직한 체격(183cm·101kg) 덕분에 투구할 때도 마음이 편안했다"고 전했다. 장채근은 주전으로 올라선 1988년부터 네 차례 해태의 우승을 이끌었다. 1993년엔 해태에서 10승 투수가 6명이나 나오는 데 기여했다. 한국 야구의 에이스 선동열의 '마누라' 혹은 '해태 왕조'의 주전 포수라는 이미지는 지금도 강렬하게 남아 있다.
김동수(48) LG 퓨처스팀 감독과 박경완(44) SK 1군 배터리코치는 1990년대에 데뷔해 2000년대까지 활약한 장수 포수다. 김 감독은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 최다(7회) 수상자다. 입단 첫해인 1990년부터 돋보였다. 110경기를 뛰며 타율 0.290·13홈런을 기록했다. 신인왕을 거머쥐었고 LG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보탬이 됐다. 무려 20시즌을 뛰며 통산 타율 0.262에 202홈런을 때려냈다. LG와 현대를 각각 두 번씩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포수다. 꾸준한 자기 관리도 돋보였다. 첫 수상 이후 13년 만인 2003년에 골든글러브를 다시 수상했다. 전성기 때보다 더 좋은 성적을 남겼다.
1992년부터 8시즌 동안 그와 함께했던 차명석 MBC SPORTS+ 해설위원은 김동수의 가장 큰 장점으로 '포용력'을 꼽았다. 차 위원은 "많은 이들이 김동수 같은 '선수'가 되길 바랐지만 나는 김동수 같은 '사람'이고 싶었다. 다른 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분이다. 역대 포수 중 그보다 더 잘한 포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동수보다 투수를 깊게 배려한 투수는 없을 것이다. 입단 첫해부터 '스타'였지만 누구에게나 진실했다. 그 값어치를 따질 순 없다.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던 포수였다"며 그를 설명했다.
수 싸움과 볼 배합에 있어서는 박경완이 역대 최고였다는 평가를 하는 이들이 많다. 그는 유일하게 한 시즌 동안 40홈런을 친 포수였고,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한 시즌은 16회에 달한다. 유일한 통산 300홈런 타자기도 하다. 현대와 SK '왕조'를 이끌었다. 골든글러브를 처음 수상한 1996년 그는 홈런(15개) 10위, 타점(74개) 7위를 기록했다. 무엇보다 뛰어난 건 도루 저지 능력이다. 121번의 시도 중 60번을 잡아내 도루 저지율 0.496를 기록했다. 그는 역대 800경기 이상 출전한 포수 중 통산 도루 저지율(0.382) 1위 기록을 세웠다.
1991년 입단 동기이자 쌍방울과 SK에서 15시즌을 함께 뛴 김원형 롯데 수석코치는 박경완의 영민한 볼 배합을 믿었다고 전했다. 그는 "팀 투수들에게 '항상 고민을 많이 하는 포수'라는 인상을 줬다. 동료 투수는 물론 상대 타자에 대한 분석이 철저했다. 무엇보다 순발력이 좋았다. 상대 타자의 반응을 잘 포착해 투수를 리드했다. 그를 향한 믿음이 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한 볼 배합도 인정해 줬다. 경기가 끝난 뒤 복기하며 다음 경기에서 더 나은 투구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해 주는 포수였다"고 돌아봤다.
진갑용(42)은 2000년 이후 최다(7번) 한국시리즈 우승팀인 삼성의 안방마님이었다. 이만수의 계보를 잇는 삼성의 명포수다. 총 7시즌 동안 팀의 주장을 맡았고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2006년 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2008년 시드니올림픽에도 승선하며 국가대표팀의 안방까지 책임졌다. 지난해 4월엔 박경완을 넘어 최고령 포수 출장 기록을 경신했다.
그 역시 앞서 언급한 포수들처럼 뛰어난 능력을 골고루 갖췄다. 11시즌 동안 그와 함께한 정현욱 삼성 코치는 "경기를 읽는 감각, 철저한 상대 타자 분석, 팀 투수 컨디션 파악 등이 돋보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위기에서 신뢰할 수 있는 포수였다"고 말했다. 정 코치는 진갑용이 마스크를 쓴 경기에선 주자가 3루에 있어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단순히 포구나 블로킹 능력으로 진갑용의 능력을 설명하긴 어렵다. 어떤 투수라도 3루에 주자가 있으면 변화구 구사에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진갑용 포수가 앉아 있을 때는 망설임이 없었다. 능력 이상의 신뢰를 줬다"고 말했다.
강민호(31·롯데)는 양의지와 함께 한국 야구 안방을 이끌어 가고 있다. 데뷔 2년 차던 2005년부터 100경기 넘게 뛰며 일찌감치 주전 포수로 자리 잡았다. 강타자 포수다. 선수 생활 초반엔 힘이 있었지만 정교함이 떨어졌다. 그러나 서른 살이던 지난해부터 2년 연속 3할 타율을 쳤다. 개인 시즌 최고 기록도 2년 연속 경신했다. 2008년 롯데를 8년 만에 포스트시즌으로 이끌며 첫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이후에도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국가대표 안방마님으로 거듭났다. 지난해는 35홈런을 기록하며 박경완(2004년) 이후 11년 만에 한 시즌 동안 30홈런을 넘게 때려 낸 포수로 이름을 올렸다. 그가 올 시즌까지 기록한 홈런은 196개. 박경완이 갖고 있는 포수 통산 최다 홈런(314개) 수에 가장 근접한 선수다.
리더로서도 성장을 거듭하는 중이다. 강민호는 올 시즌 처음으로 팀의 주장을 맡았다. 그라운드뿐 아니라 클럽하우스에서도 동료들을 아울러야 한다. 스프링캠프부터 발로 뛰는 모습을 보이며 동료들의 귀감을 샀다. 20대 초반 젊은 선수들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강민호도 한때 롤모델이던 박경완의 볼 배합을 따라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경험을 쌓으면서 자신만의 방법을 찾았고 백업 포수 안중열에게도 "네 생각이 정답이다"고 격려한다. 팀 마운드의 미래인 박세웅에게는 "신인 시절 장원준과 닮았다. 정상급 투수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췄다"며 칭찬했다. 적극적으로 후배들에게 다가가며 사기를 돋우려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