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권에서는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 26일을 '박싱데이'라고 부른다. 이름 그대로 '상자를 꾸리는 날'이라는 뜻의 박싱데이는 원래 옛 유럽의 영주들이 이날 주민들에게 상자에 담은 선물을 전달한 데서 유래했다.
특히 중세시대 영국에서 고용주가 크리스마스에도 일을 해야 했던 하인들에게 그다음 날인 26일 휴가를 주면서 선물이나 보너스, 남은 음식 등을 담은 상자를 함께 전해준 것이 기원이 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 유래가 무엇이든 확실한 것은 '박싱데이'가 나눔과 휴식을 즐기는 날이라는 점이다.
◇ 숨막히는 일정에 울상짓는 감독·선수들
그러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서는 다르다.
EPL에서 박싱데이가 갖는 의미는 휴식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한 시즌 중 가장 일정이 바쁜 날 중 하나다. 12월 26일 박싱데이에 반드시 경기를 치르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를 시작으로 겨울 휴식기를 갖는 유럽 내 다른 리그들과 달리 EPL 선수들은 크리스마스가 있는 주에 휴가를 받는 대신 주 3회에 달하는 경기를 소화해야 한다. 지옥에 들어서기 전 갖는 짧은 휴식이다.
요일 상관 없이 26일에는 반드시 경기를 치르는 박싱데이 덕분에 리그 스케줄도 꼬이기 일쑤다. EPL 팀들은 주말 경기를 치른지 불과 이틀, 사흘 만에 다시 26일 박싱데이 경기를 치르고 돌아오는 주말 경기를 또 치러야 하는 가혹한 상황을 자주 맞닥뜨린다. 그나마 올해는 26일이 현지시간으로 월요일이라 주말 경기와 겹쳐 열리기 때문에 부담이 덜한 편이다.
하지만 박싱데이로 시작해 연말연시까지 줄줄이 이어지는 경기 일정은 언제나 EPL 팀들의 고민거리가 돼 왔다. 짧은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경기가 열리는 만큼 선수단의 체력 관리가 어렵고 피로 누적을 막을 방법이 없어서다. 실제로 이 기간 동안 부상을 당해 전력에서 이탈하는 선수들도 많고, 이 때문에 한 시즌 구상이 송두리째 망가져 울상을 짓는 감독들도 많다. 로테이션은 필수고, 어느 팀이 더 두터운 선수층을 확보하느냐에 따라 단숨에 순위가 바뀔 수도 있다. 당연히 EPL 감독들과 선수들 사이에서는 박싱데이 일정에 대한 불만이 하늘을 찌른다.
지난 시즌 처음으로 EPL 무대에 입성한 위르겐 클롭(49) 리버풀 감독은 처음 겪는 박싱데이 일정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클롭 감독은 지난해 박싱데이를 앞두고 "경기 일정이 너무 심하다. 이게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건 모두 알고 있지 않느냐"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로날드 쿠만(53) 에버턴 감독도 EPL 사령탑을 맡은 첫 해인 2014년 당시 "박싱데이는 미친 일정"이라며 강한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웨인 루니(31·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시 "이런 일정은 누군가에게 심각한 부상을 초래할 수 있다"며 가혹한 일정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선두 첼시 뒤쫓는 박싱데이의 '추격자들'
순위표가 요동치는 박싱데이 일정에서도 언제나 가장 많은 관심을 모으는 것은 선두 경쟁을 펼치는 상위권 팀들의 성적이다.
하지만 선두가 바뀔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현재 리그 1위를 질주 중인 첼시(14승1무2패·승점43)의 기세가 워낙 무서운 탓이다. 팀 창단 이후 최다 연승(11연승)을 달리며 승승장구 중인 첼시는 2위 리버풀(11승4무2패·승점37)에 승점 6점 차로 앞서 있다. 이 기세라면 2002~2003시즌 아스널이 세운 13연승(단일 시즌)과 2001~2002시즌·2002~2003시즌 두 시즌에 걸쳐 세운 14연승(최다 연승) 기록도 넘어설 만하다.
박싱데이 일정도 나쁘지 않다. 첼시는 오는 27일(한국시간) 본머스와 홈 경기를 시작으로 내년 1월 1일 스토크 시티(홈), 1월 5일 토트넘(원정)전을 연달아 치른다. 3경기 중 2경기를 안방에서 치르는 데다 경기 사이사이 휴식일이 최소 4일은 보장된 만큼 체력적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일단 크리스마스까지 1위 자리는 확보하면서 기분 좋은 '크리스마스의 확률'도 가져갔다.
EPL 출범 이후 크리스마스에 1위를 한 팀이 리그 우승을 차지한 경우는 24시즌 중 절반에 달하는 12시즌이다. 확률만 보면 최소 50%의 우승 가능성이 보장된 셈이다.
선두 첼시는 유유자적이지만, 박싱데이를 맞이한 추격자들은 마음이 급하다. 첼시 이하 4위까지의 '빅4' 순위표는 지금도 쉴 새 없이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17라운드 에버턴전 1-0 승리를 거두며 2위로 도약한 리버풀은 박싱데이가 기회다. 28일 스토크시티(홈)-1월 1일 맨체스터 시티(홈)-1월 3일 선덜랜드(원정) 3경기를 연달아 치르는데 그 중 2경기를 안방에서 치를 수 있다.
그 뒤를 쫓는 3위 시티(11승3무3패·승점36)도 박싱데이 반등을 노리지만 일정이 만만치 않다. 27일 헐 시티와 원정 경기를 시작으로 1월 1일 리버풀(원정), 1월 3일 번리(홈) 경기를 치르는데 3경기 중 2경기가 원정인 데다 리버풀전과 번리전 사이 휴식일이 하루뿐이라 부담스럽다. 그래도 17라운드 아스널전 역전승으로 상승세를 탄 데다 페르난지뉴(31)와 세르히오 아구에로(28)도 징계 복귀를 앞두고 있다는 점이 호재다. 2, 3위 경쟁이 리버풀과 맨시티의 대결 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이유다.
한편 4위로 처진 아스널(10승4무3패·승점34)도 박싱데이를 어떻게 버티느냐에 따라 선두 경쟁에 박차를 가할 수 있고, 이들 '빅4' 외에도 호시탐탐 반전을 노리는 토트넘, 맨유가 기다리고 있다. 6위로 처져 있는 맨유는 크리스마스에도 선수들을 소집해 박싱데이 준비에 '올인'할 예정이라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