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파탈'이라는 수식어가 점점 더 잘 어울린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출신으로 '원조 뇌섹남'이라는 표현도 딱이다. 거친 수염에 휙휙 빗어넘긴 헤어스타일도, 쫙 빼입은 수트 패션도 소화 가능하다. "오늘은 인터뷰 한다고 샵 좀 다녀왔어요"라며 방긋 웃는 미소가 진솔하다.
영화 '판도라(박정우 감독)'는 늦은 오후 퀵으로 시나리오를 받아 읽은 후 곧바로 출연을 결정지은 작품이다. 정진영은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개봉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은 들었지만 그것이 작품을 선택하는데 있어서는 어떠한 문제도 되지 않았다. 배우에게는 반가운 시나리오였다"고 밝혔다.
정부에 대한 생각, 시국에 대한 시각도 한결같다. 물론 일부러 나서서 언급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할 만한 자리에서 이야기가 나왔으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못 할 말이 뭐가 있겠냐는 속내다. 굳이 내 생각을 숨길 필요는 없다는 것.
과거 예술가가 꿈이었고 20여 년간 배우 인생을 걸어왔지만 여전히 현실에 적응 중이다. 나이가 듦에 따라 달라지는 역할, 작품을 받아들이는 일도 녹록찮다. 연기 외 관심사도 결국은 연기와 연결된다. 끊임없이 긴장하라. 정진영이 말하는 배우의 기본 자세다.
※인터뷰 ①에서 이어집니다
- 박정우 감독과는 잘 통했나.
"엄청난 추진력이 있는 분이고 현장을 좀 터프하게 운영하는 편이다.(웃음) 처음에는 '왜 이렇게 터프하지?' 싶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일상화 되니까 괜찮더라. 내면은 착하고 여린 사람인데 말할 때 좀 위악적인 부분이 있다. 익숙해지면 이해된다. 그리고 민감한 소재였기 때문에 압박감이 컸을 것이다."
- 촬영 현장도 전쟁터였을 것 같다.
"너무 더웠다. 공기가 안 통하는 방재복을 입고 뛰어다녀야 하니까 죽겠더라. 헬멧도 누가 씌워주고 벗겨줘야지 혼자서는 못하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공기를 투입하는 장치에 배터리가 없으면 공기가 안 통한다. 촬영 도중에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당장 스톱할 수가 없다. 벗을 수도 없고 벗겨 달라고 손짓해도 연기인 줄 아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한 번 했는데 죽는 줄 알았다."
- 너무 위험한 것 아닌가.
"굳이 그렇게 안 만들어도 되는데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나름 이유가 있었겠지. 안전 준비를 철저히 한다고 해도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조심해야 할 부분들이 있었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얼굴 한 번 제대로 내비치지 못하고 대사 한 줄 없었던 배우들까지 정말 많이 고생했다."
- 김남길은 어땠나.
"처음 인상은 까칠해 보였는데 주변을 엄청 잘 챙기고 촬영장의 활기를 띄워주더라. 분위기 메이커였다. 트레이닝복 입고 왔다 갔다 하면서 영화 속 동네 청년처럼 영화를 리드해 가는 것이 보기 좋았다."
- 가장 신경쓰였던 장면은 무엇인가.
"두 부분이다. 첫 번째는 아무래도 전체적인 스케일이다. 영화는 규모만 크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관객들을 몰입 시켜야 한다. 짜임새가 있다는 믿음은 있었지만 이게 또 영상으로 보면 다르지 않나. 기술적으로 잘 해결된 것 같아 좋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남길이의 클라이막스 장면이었다. 시나리오 상에서도 워낙 대사가 길어서 '이 부분이 어떻게 구현될까' 싶더라. 개인적으로는 합격점을 주고 싶다."
- 마지막 영정 사진이 펼쳐질 땐 세월호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년 동안 겪은 사건들, 그리고 최근 두 달간 겪은 상황 속에서 각인되고 학습된 감정들이 남아있는 것 같다. 사실 우리 영화는 원전에 대한 이야기가 주인데, 청와대 장면도 그렇고 현 시국과 맞붙여서 해석을 하시더라. 이렇게 보든 저렇게 보든 해석은 관객의 몫이고 그것이 정답이다. 내가 출연한 영화지만 나 역시 많이 씁쓸했다."
- 원전 위험성에 대한 취지 역시 잘 드러났다.
"원전 사고도 현실과 많이 맞닿아 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더 그렇게 될 것이다. 이 영화를 통해 한 번쯤 경각심을 갖자는 취지니까 그런 메시지도 담아 가셨으면 좋겠다."
- 원래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이 많은가.
"막 찾아 다니는 사람은 없는데 새로운 자극이 없으면 사람은 그냥 하던대로 하고, 살던대로 살려는 관성이 있는 것 같다.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고. 그런 지점을 경계하려고 한다."
- 특별한 방식이 있다면.
"여행을 좋아한다. 그리고 새로운 작업 방식도 좋아한다. 프랑스 칸에서 홍상수 감독과 영화를 찍었는데 나에게 굉장한 자극이 됐다. 그간 해 오던 스타일의 촬영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 선하더라."
- 칸 공항에 홍상수 감독·김민희·장미희 씨와 계신 것을 봤다. 당시 영화제와 시기가 겹쳤다.
"아, 그 때 영화제에 참석 하셨나. 맞다. 기자 분들이 많이 계시더라. 우리 숙소 바로 위에 기자 숙소가 있었다. 사진도 찍히고 기사도 실시간으로 보도됐던 것으로 기억한다.(웃음) 원래 외부에 알리지 않기로 했던 프로젝트였는데 현지 상황을 보니 안 알려질 수 없겠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