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 힐만 니혼햄 파이터스 감독이 2006 년 출전했던 아시아시리즈(코나미컵)에서 일본 취재진에 둘러싸여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IS포토] 다르빗슈 유, 오타니 쇼헤이로 유명한 닛폰햄 파이터스는 70년 팀 역사 중 큰 전환기가 있었다. 바로 2004년 홋카이도 연고이전이다. 1946년 출범해 도쿄팀으로 살아온 파이터스는 요미우리와 공동구장 사용에 대한 불리함, 당시 6개 구단이 몰려있는 관동권역 과밀화로 연고이전을 추진하게 됐다.
파이터스는 경쟁 없이 연고정착을 할 수 있고, 구장 시설이 최신인 지역을 물색했다. 여러 후보가 있었지만 홋카이도 삿포로시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당시 삿포로돔은 요미우리, 세이부 등 프로야구 출장시합으로 관중 동원력이 확인됐었고, 평소 축구 경기로만 돔을 운영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파이터스는 도쿄돔을 쓰는 것 보다 삿포로돔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연고이전 추진과 동시에 구단 사무국은 홋카이도에서 새 삶을 생각하게 됐는데, 첫째 구단이 체계를 갖고 움직일 것. 둘째 도민들에게 다가갈 것 셋째 모두가 즐거운 챔피언 등극이었다. 감독선임 역시 궤를 같이 했다. 파이터스는 마이너리그의 체계를 잘 알고 있을 것. 선수, 코칭스테프들과 유연한 자세를 가질 것. 마지막으로 연고정착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맨쉽이 있을 것이었다.
첫째 항목의 ‘구단의 체계’는 선수단의 운영을 포함한다. 파이터스는 기본적으로 돈이 많지 않은 구단이다. 모기업이 식품계열로 큰 돈을 만지기 어렵고, 연간 한화 120억원이상 지출해야하는 삿포로돔 이용료가 걸린다. 물론 연고이전 전후로 이슈 몰이를 위해 신조 츠요시, 이나바 아츠노리 등 대형영입을 했었다. 자금 사정과 건전한 팀을 만들기 위해 선수선발과 육성에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고 힐먼은 적임자였다. 힐먼 감독은 파이터스 취임이전 뉴욕 양키스 산하에서 11년간 감독 경험이 있었고, 텍사스 레인저스 육성이사 및 코디네이터로 재직한 것이 메리트로 작용했다. 파이터스는 현재까지도 당시 구축해놓은 체계를 사용하고 있다. 쉽게 말해 ‘어떤 선수를 뽑아야하는가’, ‘뽑은 선수는 언제까지 기다려야하는 것인가’, ‘지금 뛰는 선수는 언제까지 활약을 이어 갈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들이며, 구단 대외비로 외부에 공개된 적은 없다.
특히 파이터스는 현지 전문가들로부터 좋은 선수층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대표적인 선수로 나카시마 타쿠야, 니시카와 하루키 등 출루율이 좋은 선수와 타카나시 히로토시, 카토 타카유키 등 스윙맨으로 마운드를 지탱해줄 선수들까지 테마를 가지고 선수선발, 육성을 하고 있다.
힐먼 감독은 “감독의 역할은 선수들이 편안한 환경에서 경기를 치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며 서포터임을 자처했다. 또 선수 개개인의 성격을 파악해서 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힐먼 감독과 함께한 신조, 가네코 마코토 등은 선수 개개인의 능력을 끌어올리게 하기 위해 선수들의 취향을 존중해줬다고 했다. 잡음도 존재했는데, 팀 분위기를 흩트리는 선수에게는 가차없이 철퇴를 가했다.
마케팅 측면에서는 어땠을까. 파이터스의 마케팅 담당자 사토 히로시씨는 “힐먼씨가 제 격이었다. 그가 오고 나서 선수들과 팬들의 스킨쉽이 증가했다”며 힐먼 감독이 온 후 달라진 점을 언급했다. 그리고 “선수들이 일방적으로 보여주고, 팬들이 지불하는 방식이 아닌 함께하는 방식이 자리 잡혔다”고 했다.
예를 들어 팬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악수를 하는 것은 일본구단들 모두가 하고 있다. 그러나 개막전에 구장 출입구에 선수단 전원이 나서 인사하는 것은 파이터스가 최초라고 했다. 외국인 감독의 효과가 나타나는 순간이었다고. 또 야구장이 아닌 곳에서 이벤트를 열어 팬들에게 얼굴을 비추는 것을, 일상적인 일로 만들었다는 것이 힐먼감독이 남긴 유산이라는 사토씨의 설명이었다.
그는 “당시 힐먼 감독이 자청해서 마케팅팀과 대화를 했다. 우리가 다 소화를 못할 정도로 방대했다”고 힐먼 감독이 파이터스에 남긴 것을 말했다. 파이터스는 2013년부터 홋카이도 내 179개 크고 작은 지역과 선수들 간 자매 결연을 맺고 있다. 이외 홋카이도 관련 마케팅 정책은 힐먼 감독이 재임시절 직접 제안한 것이라고 한다. 사토씨는 “힐먼씨는 연고이전 초장기에 할 것이 있고, 10년이 지났을 때, 20년이 지났을 때 할 일을 넌지시 제안해줬다”고 했다.
또 파이터스 구단은 힐먼 감독이 취임한 2003년부터 2007년까지 꽤나 오랫동안 기다려줬다. 성과를 달성한 것은 2006년이다. 파이터스는 25년만의 퍼시픽리그 우승, 44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 첫 아시아시리즈 정복을 이뤘다. 홋카이도 연고 정착이 잘되고 있을 때 달성한 우승이었다. 다만 힐먼 감독이 파이터스에서 꼭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2007년 9월 초 우승 경쟁 중이던 파이터스를 두고 가족의 신변 문제라며 중도사퇴를 했다. 또 그해 리그 우승 후 일본 시리즈를 목전에 둔 파이터스를 두고 힐먼 감독은 캔자스 시티 로열스 감독으로 취임했다. 일본 야구계는 분개했고, 파이터스 선수 뿐만 아니라 노무라 카츠야, 에나쓰 유타카 등도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후 파이터스와 관계회복에 성공한 그는 구단 주관 행사에 종종 참여하면서 좋았던 감독으로 남아있다. SK에서 어떤 행보를 보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힐먼 감독의 파이터스 재임시절을 뒤돌아보면, 힐먼 감독으로 인해 팀이 강해진 것은 아니다. 파이터스는 힐먼 감독의 말에 귀기울였고, 협력했고, 배우려고 했다. 속된 말로 잘 뽑아먹었다. SK는 힐먼 감독이 파이터스에서 남긴 것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파이터스가 이 감독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