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상무 화백의 독고탁의 그것처럼 흙먼지를 일으키며 날아가다 타자 앞에서 갑자기 솟아오르거나, 좌우로 꾸불거리며 날아가는 공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존재할 수 없다. 물리법칙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속 150km 강속구를 던지고 치는 것도 어떤 면에서 인체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이다. 이런 공이 투수의 손끝을 떠나 홈플레이트 상공에 도달하기 까지 걸리는 시간은 0.4초 정도다. 날아오는 공의 궤적을 포착한 시각정보가 뇌에 전달되는 데 0.15초 시간이 소비된다. 나머지 0.25초 안에 근육에 타격 명령을 내리고 몸이 그에 반응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프로 레벨의 타자들은 좀 다른 방법으로 이 행동을 성공시킨다. 흔히 말하듯 “공을 끝까지 보라”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타자의 능력이나 전략에 따라 다르지만 결국 어느 시점에선 공에서 눈을 떼고 -아마도- 공이 지나칠 것이라 예측되는 지점을 겨냥해 스윙을 하는 게 타격의 본질이다. 스윙 도중에 공의 궤적을 쫒는 미세한 조정도 함께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런 것은 눈으로 보고 두뇌가 판단하는 과정이 아니다. 고도로 훈련된 몸의 근육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에 가깝다.
그런 이유로 '다른', 그래서 아주 '낯선' 움직임을 가진 공은 타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눈으로 보고 두뇌로 판단하지 않는, 몸에 새겨진 훈련과 경험의 기억으로 반응해야 하는 타격 메카니즘의 사각을 찌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두산 유희관은 패스트볼 평균 스피드는 시속 129km로 KBO리그에서 가장 느리다. 하지만 '라이징 무브먼트'는 최고다. 이런 부조화가 타자의 반응을 교란한다. 그 정도 '느린공'에 대해 몸에 입력된 패턴대로 반응하면 배트는 공의 아래쪽을 지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초저공 언더핸드 박종훈의 싱커와 커브 조합도 비슷하다. 보통 빠른 공은 떠오르고(=덜 떨어지고), 느린 공은 떨어진다. 하지만 그의 공은 반대다. 느린 커브는 떠오르고 빠른 싱커는 가라앉는다.
이런 공들은 물론 물리법칙의 허용범위 안에 있기 때문에 '마구'는 아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타자 대응 메카니즘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마구에 가까운 공이다. 그렇게 봤을 때 KBO리그에는 '마구'를 던지는 투수가 있다. 넥센의 왼손 투수 앤디 밴 헤켄이다. 그의 스플리터는 다른 투수들의 구종과 사뭇 다르다.
100여년 전 투수 캔디 커밍스(Candy Cummings)는 커브볼의 고안자로 알려져 있다. 당대 타자들에게 커밍스의 커브는 마구였을 것이다. 19세기말 야구를 받아들인 일본에서는 실제 한동안 커브를 '마구'로 번역했다고 한다. 모든 새로운 구종은 탄생한 시점에는 마구다. 대응패턴이 몸에 새겨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훈련과 경험이 반복되면 타자들은 그에 적응한다. 그러면 마구는 '좀 더 좋거나 좀 더 나쁜 변화구'로 바뀐다. 그런데 어떤 공이 보통의 타자들 근육 기억에 저장된 특정 패턴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마구에 가까운 상태로 남는다.
스플리터는 떨어지는 공이지만 투구 메커니즘은 직구와 비슷하다. 원래 이름부터가 '스플릿 핑거드 패스트볼'이다. 대신 손가락을 벌려 잡아 회전을 억제한다. 그래서 패스트볼처럼 날아오다 가라앉는다. 그리고 우투수의 패스트볼이 우타자 몸쪽으로 약간 더 파고들며 날아오듯이(싱커 회전), 보통의 스플리터도 그렇다.
투구궤적추적 데이터에 따르면 평균적인 패스트볼은 회전축 147도(완벽한 백스핀은 180도·투수 손 방향에 따라 거울상 조정한 결과)로 분당 2000~2300회 회전을 한다. 평균적인 스플리터는 회전축 120도에 분당 1000~1500회 회전한다.
같은 구종이라도 투수의 메카니즘의 따라 구질은 조금씩 차이가 난다. 마이클 보우덴(두산)의 스플리터는 회전축 120도에 분당회전수(RPM) 1300회다. 리그 평균보다 회전수가 약간 많기 때문에 빠르고 짧게 떨어진다. 스플리터의 낙차 폭은 회전수가 적을수록 커진다. LG 봉중근의 스플리터는 1200RPM으로 평균 회전수에 가까운데, 회전축은 90도 방향이다. 좌투수 기준이라면 우타자 바깥쪽으로 흐르는 움직임이 생긴다. 회전 방향은 좌우 움직임을, 회전수는 낙차 폭을 결정한다.
투수마다 차이는 있어도, 평균적으론 회전축 120도·1200RPM을 중심으로 모인다. 스플리터란 원래 그런 성질을 가진 공이다. 체인지업과 비슷하며 낙폭이 좀더 크다. 위 그림에서 KBO리그 평균적인 스플리터(회색점)가 그렇다. 그런데, 유독 밴 헤켄의 스플리터(붉은색)는 회전축x회전수 차원에서 전혀 다른 위치에 나타난다.
그는 세 종류의 서로 다른 스플리터를 던진다. 첫 번째는 그냥 평범한 타입이다. 차트에서 다른 투수들의 공이 표시된 구역에 겹쳐 있다. 두 번째 타잎은 회전수 500-800RPM 사이에 있는 저회전 스플리터다. 왼쪽 아래에 표시된다. 낙차가 크다. 다른 투수보다 30cm 이상 더 떨어진다. 하지만 '마구'라고 불릴 만한 공은 세 번째 타입의 스플리터다. 회전수는 1200RPM 정도로 평범하지만 핵심은 회전 방향이다.
거의 모든 투수들의 스플리터는 약간씩 차이가 있을지언정 90도 이상의 회전축을 가진다. 그런데 밴헤켄의 스플리터 회전축은 30도에서 60도 사이다. 90도보다 회전축이 휠씬 낮다. 톱스핀 성질을 가졌다는 뜻이다. 톱스핀 성질을 가진 구종은 커브다. 보통의 스플리터가 체인지업과 비슷한 백스핀 성질을 갖는 것과 반대다. 이 대비가 밴헤켄의 세 번째 스플리터를 '마구'로 만든다. 타자의 근육기억에 이런 움직임에 대한 대응패턴이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밴헤켄 외 투수도 한 두 개쯤 이런 공을 던졌다고 기록돼 있다. 아마 실투에 가까운 공이다. 밴 헤켄만 유일하게 꾸준하게 이런 성질의 공을 던졌다.
지난해 준플레이오프 LG-넥센전을 앞두고 박용택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밴 헤켄의 스플리터는 다른 투수와 전혀 다르다. 처음 한동안은 그 공이 커브인 줄 알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커브만큼 낙차가 크다는 뜻도 되겠지만 투구추적 데이터를 참고한다면 리그최 고의 타격기술을 가진 베테랑 타자가 본능적으로 파악해 낸 정보였을 수도 있다. 밴 헤켄의 스플리터는 커브와 비슷한 회전축을 가진다.
톱스핀 회전을 하는 스플리터는 메이저리그에도 흔하지는 않다. 피치프레이밍 이론을 정초한 미국의 분석가 마이크 패스트는 몇 해 전에 보통의 스플리터와 달리 톱스핀 회전을 하는 공이 '진짜 포크볼'이라고 구분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메이저리그에서 정통 포크볼러는 너클볼러 보다 더 희소하다. 호세 콘트라레스, 스캇 라인브링크, 저스틴 스피어 등 세 명이 전부였다.
밴 헤켄이 언제 톱스핀 스플리터를 완성했는지가 궁금하다. 그는 트리플A 시절 지극히 평범한 투수였다. 9이닝당 탈삼진은 5.7개에 불과했다. 정통 포크볼러의 성적답지 않다. 포크볼은 삼진을 잡는 구종이다. 반면 KBO리그에서는 9개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외국인투수의 9이닝당 삼진율이 KBO리그에서 약간 줄어드는 경향과 반대였다.
아쉽게도 밴헤켄의 마이너리그 시절에는 투구궤적추적 데이터가 없었다. 하지만 정황으로 그가 이 마구를 손에 넣은 시점은 KBO리그 데뷔 이후였을 것이다. 두산과 한화에서 오랫동안 투수로 활약했던 차명주 한국야구학회 이사는 "아마도 톱스핀 스플리터를 던지는 투수라면 손가락이 길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밴 헤켄은 손가락이 길다. 이런 생각이 든다. 손가락이 긴 한국 투수 유망주라면 밴 헤켄의 '마구'를 훔칠 수도 있지 않을까. 프로야구 구단들이 밴 헤켄과 같은 구질의 스플리터를 던지는 투수를 발굴한다면 어떨까. 지금 트리플A에선 밴 헤켄과 비슷한 톱스핀 스플리터를 던지는 투수가 세 명 있다.
신동윤(한국야구학회 데이터분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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